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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나이 소비자로서의 온유함

 

 

지난밤 빗물에 젖은 낙엽이 사람들 발길에 밟혀 형체를 잃어가고 있다. 생각 없이 아침 산길에 나섰다 낙엽의 가는 길을 생각하게 된다. 생명의 끝인 허(虛)와 공(空)과 무(無)를 떠올리게 된다. 공부하고 기도한다는 게 결국은 얼마나 부끄러움을 알고 살다 가는가?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헸다.

 

산길을 돌아 동물원 뒷산 숲 속 휴식공간에 이르렀다. 운동기구와 함께 장의자 세 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여기 앉으세요. 스티로폼을 놓아두어 젖지 않고 온기가 남아 있네요.”하고서 의자에 앉아 있던 분이 내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히 갈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은연중 그분 뒷모습에 시선을 주고 한동안 서 있었다. 회색 점퍼에 검은 바지, 반백 머리스타일과 하얀 운동화에서 노인의 온유함이 깊게 느껴졌다.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가로 50cm 세로 20여 cm의 직사각형 스티로폼에서는 노신사의 궁둥이 체온이 남아 있었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의 역사는 자리다툼의 투쟁이 아니었을까. 눈비가 내릴 때는 습기가 없는 자리, 추워지면 태양 볕이 잘 드는 곳.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너럭바위의 중심- 농본 사회의 아랫목 자리에서부터 장군의 자리와 졸병의 자리. 신입사원 자리와 회장의 자리는 곧 존재 가치의 질적 변화가 아니었을까.

 

시절은 지금 대설 추위 때다. 그러나 우리 삶의 시절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대통령 자리에 앉겠다는 후보자와 측근들 목소리와 움직임만 방방 뜨고 있다. 후보자 중에는 지난날 현직 대통령이 법을 어겼다고 교도소로 보내는데 앞장선 법관도 있고 보면 세상사 이래도 되는지 인문학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리고 후보자는 어떤 초능력이 있으며 경제력이 있는지 숱한 약속과 장담하는 말을 듣노라면 내가 사는 세상이 맞는지 싶다. 이분들이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하겠다.’고 말한 중국 북송 시대의 걸출한 사상가요 정치가이며 문학가이었던 범중엄의 글에 한 번이라도 눈을 주었는지 묻고 싶다.

 

소설가이자 교수인 송준호 씨가 쓴 칼럼을 보면 ⸀세상에 대한 예의와 범절」 이란 글이 있다. 예절은 단순한 생활 범절을 넘어서 ‘세상을 예우함’을 말함이라 했다. 따라서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과 사물에 대한 애정과 온순한 마음가짐을 온몸에 배도록 익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을 예우할 줄 아는 온순한 마음가짐을 몸에 배도록 익히는 것’ 이것이 공부요 학문의 길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싶어 이 문장에 한참을 눈 주며 생각해 보았다.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사람의 정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덕목이기 때문이다. 목소리 높이며 눈동자 굴려가며 사람 기죽이는 그들의 가슴에는 인문학 정신이라는 단어와 겸손이라는 언어가 저장되어 있기나 한 지 묻고 싶다.

 

나는 요즘 길을 걸으며 낙엽이 가는 길을 생각해 보곤 한다. 길을 간다는 것은 이별을 뜻한다. 길은 길에서 만나고 사람은 사람의 길에서 만난다. 오늘 아침 숲 속 의자에서 자리를 선뜻 내주고 간 노신사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나이 소비자로서 만나는 분들에게 온유하게 대하기 위해 사유의 온유함을 생각하면서 더 겸손해져야겠다는 마음을 껴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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