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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시민의 지배”를 위해

온전한 적폐청산의 실패, 그 원인은?

 

2016년 촛불혁명으로 등장할 수 있게 된 문재인 정부 5년, ‘적폐청산’이라는 말과 작업은 쉽지 않았다. 물론 이에 대한 저항과 피로도 운운하면서 그 과정을 파산시키고자 했던 특권세력의 기만책이 작동한 측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낡은 세력과 구조를 어떻게든 청산하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박약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윤석열의 정치적 성장이 그 모든 과정의 총체적 결과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초기에 적폐를 진압하고 그 다음의 역사를 위한 교량 설계와 건설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협치 운운”으로 때를 놓치고 전략적 혼선을 빚었으며 말만 요란한 채 “적폐청산 피로도 논리”가 득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적폐특권 세력의 요새화는 더욱 굳건해졌고 이들의 정치적 결속은 더욱 강해지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새 슬그머니 “촛불혁명”이라는 말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촛불정부”라는 호칭도 스스로 철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상황으로 이어졌다. 진보적 개혁의 역동성은 좌초했고 이를 주장하는 세력은 “주변부화”되는 국면이 펼쳐졌다. 촛불혁명의 시민세력은 이로 인해 이탈, 분열을 겪으면서 세력 약화의 지점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일직선으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촛불혁명의 저력은 끈질겼고 그 정치적 목표인 “시민지배”의 열정과 의지는 식지 않았다. 2022년 대선의 몸통은 바로 이 힘이며 그것이 현실을 밀어나가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선 승리를 이루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도 결과에 대해 초긴장 상태인 처지에 이건 너무 이른 기대와 예상일까? 아니다. 이런 의식의 재장전과 의지를 강력히 만드는 것 역시 대선 승리의 요체가 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열매로 무대에 오르게 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인식착오와 오류, 그리고 그 책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예상되는 병에 대한 진단과 대처의 기본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성찰과 시민

 

병이란 초기에는 치료하기는 쉽지만 진단하기는 어렵다. 마키아벨리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초기에 발견하는 역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때를 놓칠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단하기는 쉬워도 치료하기는 어렵다며 국가 통치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이를 권력과 관련해 명확한 정치적 지침과 역사적 사유로 만든 것은 그의 공로다.

 

“정치적 문제를 일찍 인지하면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되어 모든 사람이 알아차릴 정도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단서가 있다. 이를 인지하는 것은 “현명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사 연구를 통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로마인들은 재난을 미리부터 예견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화근이 자라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재난을 예견하고 그 화근에 대한 단호하고 확실한 초기 대응이 답이라는 것이다.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그들은 전쟁이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에게 유리하도록 지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사 논고』라는 책을 쓴 뛰어난 역사학자라는 점을 주목하면 이러한 그의 판단에 대해 주시하게 된다. 이 책은 1531년 출간, 『군주론』보다 먼저 나온 책이며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중심으로 로마 공화정을 연구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이 논의의 결론은 이렇다.

 

“타인(적)이 강력해지도록 도움을 준 자는 자멸을 자초한다.”

 

촛불정부 초기, “협치”에 방점을 두면서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바로 이러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보일락 말락 시작되었던 극우 태극기 부대의 오늘을 보면 이는 분명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지낸 자의 정치검찰 쿠데타 과정과 정치적 위세의 현재를 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과정의 전개가 마키아벨리의 논리나 예상과는 달리 흐르게 된다. 군주가 모든 것의 절대적 결정자였던 시대와는 달리 시민의 힘이 그 중심에 놓여 변화 발전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시민이 나섰다. 그리고 이 시민들은 이제 직접 지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대의제의 한계와 본질적인 기만을 꿰뚫어 보게 된 것이다. 명실상부한 ‘시민지배’, 또는 ‘시민권력의 체제’를 향한 “거대한 전환”의 행진을 펼쳐내고 있다.

 

독재관 술라와 민중파의 대결

 

 

고대 로마에서 “술라”는 무서운 독재자였다. 공화정 시대에 나타난 권력집중이었다. 로마의 공화정이라는 것은 민중과 귀족의 계급 투쟁에서 만들어진 정치적 타협물이었는데 술라의 기반은 귀족세력이었다. 이 술라의 통치에서 살아남은 카이사르는 민중파 출신의 인물이었고 이후 그의 정치적 승리는 민중파의 기세가 상승하면서 이뤄진 결과였다.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말로 유명한 카이사르의 암살이 원로원이라는 귀족세력의 서식처에서 벌어진 까닭도 민중파에 대한 원로원의 앙시앙 레짐이 저지른 반격이었다. 카이사르는 이후 역사가 왜곡되게 기술한 것과는 달리 민중파의 지지를 확고히 획득한 지도자였고 그의 죽음은 공화정이라는 이름의 옷을 걸친 원로원 귀족세력의 반동적인 총반격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술라로 돌아가보자. 집정관(consul)을 지냈던 술라는 전쟁과 내분의 상황을 내세워 비상사태를 관리하는 무기한 임기를 가진 ‘독재관’으로 등극하게 된다. 독재관의 명칭은 매우 긴데 그 라틴어 표기는 “ dictator legibus faciendis et reipublicae constituendae causa”로서 “헌정질서 해결과 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지닌 독재관”이다. 국가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민중파의 거두는 마리우스였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양녀 코제트의 연인의 이름이 마리우스라는 것을 기억하다면 위고가 어찌해서 이 이름을 이 청년에게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혁명의 시대에 마리우스는 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건져올린 민중의 지도력을 압축하는 상징적 호칭이기 때문이다.

 

이 마리우스가 바로 카이사르의 이모부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정치적 후견자이기도 했다. 참으로 묘하게도 술라는 마리우스 밑에서 군사재무관이라는 부하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그는 이후 마리우스파를 철저하게 제거했는데 당시 17세 소년이었던 카이사르는 여론의 보호로 살아남게 된다.

 

 

그렇다면 민중파의 정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오랜 계급투쟁이 벌어졌던 고대 로마에서는 이들의 이해를 대변할 기관으로 ‘호민관(護民官/tribune)’을 지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국가 소유의 토지를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토지 개혁법 제정(lex agraria)에 전력한다. 그러나 원로원의 반격으로 그는 ‘평민 대학살’ 과정에서 참살당하고 만다.

 

 

그의 아우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역시도 형과 같은 길을 걷는다. 마리우스는 그라쿠스의 민중파를 기반으로 그의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으며 술라의 집권은 민중파에 대한 일대 타격이 된다. 술라는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했고 그라쿠스 형제가 시작했던 토지개혁법과 빈민구제를 위한 곡물법을 폐지했으며 사법제도에서 배심원을 원로원으로만 구성하게 다른 계급이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호민관의 정치적 지위는 약화시켰다.

 

 

술라의 묘비명은 평소 그의 신념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그는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 쿠데타를 일으켰던 장본인인데 이 경험으로 로마에는 군대로 무장해서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카이사르와 공화정 그리고 ‘시민권력의 발동’

 

훗날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것은 이제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뜻도 있지만 무장한 군대를 끌고 로마로 들어왔다는 의미이자 술라의 통치제도가 무너진 것을 말해준다.

 

카이사르와 3두체제를 이끌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술라의 부하로 컸으니 카이사르가 자신이 포함된 이 3두 체제를 정치적 타협과 균형을 깨고 독자적 권력의 기세를 조직한 것은 그라쿠스-마리우스로 이어지는 민중파, 개혁파의 승리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도 마리우스 계보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지만 술라의 기반에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보수파라고 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집권하면서 민중의 권력이 주도하는 민회의 구성을 확대하고 귀족으로 이뤄진 원로원의 기능을 축소시켰으니 그가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던 것은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 처음 칼을 꽂은 부르투스는 카이사르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였기도 했지만 그의 선조 루시우스 부르투스가 군주체제를 무너뜨리고 귀족세력이 주도하는 공화정을 시작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기억해보면 이는 로마 역사 가운데 펼쳐진 한 장면임을 알게 된다. 로마의 “공화정”은 귀족들의 민주정이었지 민중을 위한 정치구조는 아니었고 이들을 대변했던 카이사르의 죽음은 ‘민중파의 혁명정치’가 좌절당하는 사건이었음이 뚜렷해진다.

 

“공화정을 파괴한 카이사르”라는 역사해석은 따라서 교정될 필요가 있다. 그는 귀족의 과두정치를 해체하고 민중파 권력을 강화하려했던 것이며 이러한 혁명적 시도는 암살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역사의 엄중한 교훈이다.

 

 

태종 이방원은 세종이 등극하면서 상왕의 위치에서 정치적 후견자로 척신, 공신을 제거한다. 세종의 장인 심온과 그의 동생 심정 등 세종의 처가는 멸문에 가까운 재난을 겪는다. 개국공신 임언충의 아들 임군례가 처형당하는 것도 모두 세종의 정치적 권위에 훼손이 될 조짐을 보이는 것으로 간주, 즉시 단호한 조처를 취한 결과였다.

 

이는 모두 사대부 권력과 군주의 권력이 서로 갈등하고 긴장하면서 전개되는 조선 정치체제의 역학에서 세종의 정치 안정화에 결정적 의미를 지닌 일들이었다. 아니었다면, 세종은 오늘의 우리가 아는 세종이 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로마나 우리 역사에서 보인 이러한 예들이 다 고귀한 가치를 목표로 했다는 뜻은 아니다. 재난이 될 사태에 대한 예견과 진단, 그리고 대처의 긴급성과 중대함에 대한 논의의 관점에서 볼 대목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군주와 귀족세력 대신 민주주의의 중심에 있는 “시민의 지배”는 이러한 역사에서 그때와 다르지 않은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내게 된다. 시민혁명은 이처럼 단호함과 대응의 힘이 무장되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주창한 것도 흔히들 알고 있는 독재체제를 내세운 것이 아니다. 그건 오산이고 왜곡이며 지배세력의 기만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혁명권력의 정치학이다. ‘민주주의’라고 번역되는 ‘데모스크라티아(demoscratia)’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철학과 사상, 이념과 가치는 정치를 통해서 관철되기 마련이다. ‘2022년 대선’은 그러한 정치를 향해 가는 “시민지배의 역사적 투쟁” 자체다. 이제 우리는 기성의 정치에 더는 속지 않을 것이며, “시민권력의 혁명적 발동”을 위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그건 민주체제에서 우리 모두의 정치적 기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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