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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밀정 엄인섭과 공사 이범진을 생각한다

 

젊은 날 빛나고 아름다웠던 사람이 나이 들어가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해지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난다.

 

한때 안중근 참모중장의 가장 가까운 동지의 한 사람이었던 엄인섭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건너가 안중근과 함께 국내진공 작전을 펼쳤던 독립군 대장이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게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싸우고 가장 크게 이겼던 홍범도의 결의형제이기도 했다. 홍범도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남은 젊은 시절의 엄인섭은 누구보다도 훤칠하고 멋진 남아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일본의 밀정이 되어 독립군을 팔아넘기며 비루하게 살다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무엇이 한 아름다웠던 청년을 그토록 추하고 불쌍하게 만들었을까. 흔히 사람들이 변절과 타락으로 자신의 삶을 더럽히는 이유를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추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밀정이 된 자들이 변절한 가장 큰 이유는 실망하거나 절망해서였다. 변절자들은 보통사람보다 대체로 훨씬 유능하고 성실했다. 그들이 변절하는 이유는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실망하고 절망하고 원망해서였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의 최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게 된다. 자신을 추한 변절자로 이끄는 병을 얻는 것이다.

 

반대로 젊은 날 형편없던 사람이 나이 들어가면서 놀랍게 아름다워지는 사람이 있다.

 

한때 파락호와 다름없는 탐관오리였던 리범진이 그랬다. 대원군의 충복이었던 훈련대장 이경하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지방 수령을 지냈던 젊은 시절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샀다. 권력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줄 알고 그것을 마음대로 휘두르기를 주저하진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공사를 지내면서 권력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범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의 부당한 압록강 유역 산립벌채권 연장과 용암포 조차에 반대하여 공사직에서 파면당하면서도 국익을 포기하지 않았다.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일파가 일본과 야합하여 나라를 일본에 병탄시키고, 대한제국의 황제란 자가 이를 승인하자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에서 목을 맨 채 권총 세 발을 쏘아 자결했다. 그가 충성을 다했던 고종에게 보낸 유언은 통렬했다.

 

‘우리나라는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적에게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 앞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습니다. -1911년 1월 26일. 이범진’

 

이범윤은 아무도 지지 않은 망국의 책임을 물어 스스로를 처형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처형하기 전에 자신의 모든 유산을 독립운동단체에 분급했다. 왜놈들에게 제 나라를 넘겨주면서 왕족들의 예우만 구구절절이 조약에 남겨놓은 왕의 철면피함을 그가 대신 사과한 것이었다.

 

누구도 인생의 모든 순간을 잘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제 것이라 하더라도 인생을 능멸하게 내팽개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세상은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인생만큼은 내 뜻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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