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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범도루트’에서 만난 세 거인의 최후

 

지난 주에 만주 항일무장투쟁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헌신은 무한했으나 바란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던 '범도'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가는 여정의 마지막은 대련이었다.

 

나는 대련에서 잠을 설쳤다. 잠자리가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대련의과대학 드넓은 교정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정결하고 쾌적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거친 바람과 해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때문만도 아니었다.

 

대련에서 최후를 마친 세 거인의 생애가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여장을 푼 대련의과대학의 지척에 있는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참모중장이 교수형 당한 것이 1910년 3월 26일, 겨울이었다. 나는 소설 '범도'에서 다시 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안중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홍범도 장군을 쓰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시리고 먹먹했다.

 

이회영 선생이 최후를 마친 곳도 대련이었다. 상해에 머물던 그는 다시 만주로 돌아가 무장투쟁을 재개하기 위해 대련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밀정들이 이회영의 이동 경로를 일본 영사관에 알렸고, 체포된 이회영은 처참한 고문을 당한 끝에 나흘 만에 옥사했다. 1932년 11월 17일이었다. 그를 밀고한 밀정은 이회영의 조카 이규서와 연충렬이었다.

 

이규서는 이회영 형제 중에서도 가장 부자였던 이석영의 둘째 아들이었다. 남양주에서 동대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닌다고 할 만큼 많던 재산을 신흥무관학교와 독립투쟁에 모두 바치고 굶어 죽다시피 한 이석영, 그의 아들 이규서. 김구의 최측근 엄항섭의 처남이었던 연충렬. 두 배반자는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에 의해 처단당했다. 이석영은 아들이 둘이었다. 큰아들은 독립투쟁을 하다가 살해당했고, 하나 남은 아들은 사촌의 손에 그렇게 최후를 마쳤다.

 

신채호 선생이 이곳 뤼순 감옥에서 옥사한 것은 1936년이었다.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지 8년 만이었다.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 동상으로 시달리던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사흘이나 방치되었다가 1936년 2월 21일 옥사했다. 그는 ‘내가 죽거든 왜놈들 발에 시체가 채지 않게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대로였다면 그의 시신이 재가 되어 뿌려졌을 대련 앞바다의 파도 소리는 밤 깊도록 잦아들지 않았다.

 

대련에서 잠을 설친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안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이른 아침 대련의과대학 교정 산책길에서 만난 '범도루트' 1기 참가 대원 서른세 명 거의 모두 잠을 설쳤다고 했다. 누구는 바람 소리 때문이었다고 하고, 누구는 파도 소리 때문이었다고 했다.

 

진정한 이유는 범도루트의 마지막 여정인 뤼순감옥에서 여실하게 드러났다. 감옥에는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중근의 방과 신채호의 흔적 앞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눈가를 붉히고 눈물을 보이던 일행들은 교수형을 집행한 사형장에서 고개를 돌리고 뛰쳐나갔다.

 

우리 일행은 서로를 외면한 채 뤼순 감옥의 길고 높은 담장 아래 드문드문 놓인 장의자에 따로 앉아 먼 하늘을 쳐다보며 함께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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