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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말에게 말 걸기] 이 한 몸 죽어서…

 

드라마 '전원일기'는 1980년 10월 21일에 시작하여 2002년 12월 29일까지, 22년이 넘게 방송된 국내 최장수 주간 드라마이다. 나이 든 세대에게 드라마 '전원일기'는 너무도 친숙하다. 젊었던 시절 자신의 시대를 향한 향수를 담고 있는 고향 같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김포 양촌리라는 농촌 마을을 드라마의 공간으로 삼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던 시대 배경을 맥락으로 거느리며, 농촌의 일상사를 다룬 드라마이다. 그 일상사에서 묻어나는 마을 사람들의 인정을 인간적 시선으로 다가가,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드라마이다.

 

그런데, 드라마 '전원일기'가 방송을 중단해야 할 위기는 진작에 찾아왔었다. 20년 넘게 그저 빤하기만 한 농촌 마을, 그것도 몇 가구의 이야기로만 계속 드라마를 이어가기로는 궁색한 구석이 많았다. 말하자면 소재 고갈에 직면한 것이다.

 

그런 문제가 제기되자 이 드라마의 주역 주연인 배우 김혜자 씨가 획기적 제안을 했다. 그것은 이 드라마에서 자신을 죽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김혜자 씨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인 김 회장(최불암 역)의 부인으로서, 드라마상의 역할 비중이 크다. 그녀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녀가 드라마에서 죽는다는 것은 '전원일기'로서는 대사변이다. 김혜자 씨는 자기의 죽음 자체를 새 소재로 쓰면서, 자기 죽음으로 인한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만들 수 있으니, 이 드라마를 소재 고갈의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이었던 듯하다.

 

이렇게 되면 배우 김혜자로서는 드라마에 더 출연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 국민의 사랑을 받아 온 드라마의 주역 자리에서 자진하여 물러나는 것이니, 가히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제안이라 할 수 있다. 김혜자로서는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다. 이 한 몸 죽어서 이 명품 드라마를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일념을 그녀에게서 읽을 수 있다. 그녀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드라마 '전원일기'의 22년 역사 가운데 가장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여겨졌다.

 

‘내 한 몸 죽어서’의 의식은 우리가 고난을 넘어설 때, 마음먹어 왔던 일종의 정신 기제로서, 문화적 상징의 원형(archetype)일 수도 있다.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길을 택하는 것이 바로 그 원형의 신화적 모습이다. 1960년대 월남전에 전투부대원으로 지원했던 가난한 이 땅의 군인들에게도 그런 원형의 의식이 있었다. 그 무렵 나의 집안 육촌 형도 월남전에 지원하면서, “혹시라도 불운하여 목숨을 잃으면, 가난하고 병든 노모를 보살펴 드릴 보상은 충분히 된다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배에 올랐다.

 

6.25 사변 당시, 경북 경산 고모 부근으로 피란을 간 스물한 살 나의 어머니가 당시 나를 가진 태중의 몸으로 겪었던 이 땅의 전란과 피란 행로를 기록으로 남겼다. 1950년 9월 중순쯤의 일인데, 여기에서도 ‘이 한 몸 죽어서’가 나온다. 그 대목을 다시 읽어 본다.

 

우리가 피란 와서 사는 이 동네 뒷동산에는 수십여 명쯤 되는 소년병들이 1~2주일가량 훈련을 받고 간다. 밤이 늦도록 어딘가에서 훈련을 하고, 초저녁이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군가를 부르면서 젖은 옷을 말린다. 멀찌감치 보노라면 우는 군인도 있다. 피난처에서 징집되어 총 쏠 줄만 익히면 일선 전쟁터로 간다고 한다. 원을 그리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빙빙 돌면서 부르는 노래, 나는 지금도 그 모습 그 노래를 잊지 못한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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