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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의 다정한 편지] 엄마의 옷장

 

분류가 잘 된 것은 아름답지요. 이를테면, 계절을 나누고 때와 장소에 맞게 차려입을 수 있도록 정리가 된 드레스룸 말입니다. 엄마의 옷장은 그야말로 옷 무덤이었어요. 나는 엄마의 허락을 받아 옷장에서 꺼낸 옷들을 방바닥에 쌓았습니다. 옷이 든 바구니와 서랍까지 쏟자, 방 한가운데가 봉분처럼 우뚝 솟았습니다. 온갖 색이 뒤섞여 한쪽은 푸르고, 한쪽은 검고 붉어 고르게 자라지 못한 뗏장 같았어요. 헤집어 놓은 옷에서 취향 같은 것은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엄마의 옷에는 비싼 값을 자랑하는 라벨 대신 고단했던 삶이 붙어있습니다.

 

쌓인 옷가지는 헌옷 수거함에서 나온 것 같아, 다 갖다 버려도 아깝지 않아 보였는데요. 신기하게도 엄마의 눈에는 버릴 것이 없는지, 자꾸만 내 주변을 서성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며, 나는 버릴 것을 더 많이 골라냈습니다. 옷은 날개가 아니었습니다. 무릎이 나오고 보풀이 인, 수많은 계절이 한꺼번에 걸어 나왔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동전이 나오고 포장지가 붙어버린 사탕도 나왔습니다. 다른 옷에 짓눌린 스웨터의 한쪽 팔이 축 늘어져 있고, 치마는 마치 보자기 같았어요. 세탁을 잘못해서 줄어버린 니트와, 늘어진 티셔츠를 다 입을 수 있는 엄마의 몸은 놀랍기만 합니다.

 

엄마는 몰래 옷을 추려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어요. 내 눈빛을 못 이기고 슬그머니 다시 내려놓기는 했습니다. 입을 것과 버릴 것을 분류하며 엄마의 세월을 갈라놓았습니다. 옷 속에서 시간은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훌쩍 넘나들었어요. 좋은 옷은 아끼느라 못 입고, 낡은 옷은 익숙해서 버리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속옷을 버리지 못했고, 동생과 내가 싫증나서 입지 않은 오래된 옷도 있었어요. 엄마는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딸들, 그 사이에서 날마다 늙어갑니다. 옷을 들출 때마다 엄마 냄새가 났는데요, 그 냄새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았으면, 잠시 헛된 마음을 품었습니다.

 

낡고 헤진 것들을 골라내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엄마의 옷장, 아니 옷 무덤 속에서 버릴 것과 입을 것으로 분류하는 일이 쉽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습니다. 나의 기준으로는 쉬웠지만 엄마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가치를 매기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한눈에 보이도록 정리한 옷장은 보기에 좋았습니다. 한 사람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옷은, 그가 품은 욕망의 기호로 읽히기도 하지요.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기 좋은 수단이면서 몸의 결점을 숨길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숨기려는 마음은 더한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입을까? 엄마의 옷을 비우는 데는 낡고 헤진 것이 기준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더 아름다운 이유와 의미로 비워내고 정리하겠지요.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는 일은, 다가오는 계절을 마중하는 일 같아요. 어디만큼 왔는지, 저편을 향해 미리 손을 흔드는 일. 봄을 기다리며 엄마의 옷장을 정리했습니다. 유독 길게 느껴지는 겨울이었어요. 슬픔과 혼돈의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조급함이 입니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올 새순을 기다립니다. 선명하게 드러날 색을요. 봄이 오면 비워낸 엄마의 옷장에도 화사한 봄옷 한 벌 들여야겠습니다. 옷장 속에 혹시 운 좋게 내 눈을 피한, 요란한 꽃무늬 스카프 같은 게 걸려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 나의 옷장을 열어볼 차례입니다. 옷장 속에 꼭꼭 숨겨진 나의 색(色)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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