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 완화, 규제 혁파는 어떤 대통령 선거에서나 심심치 않게 제시되었던 공약이지만, 이번 대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인공지능 규제 완화 논의만큼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수준은 이제 국가의 경제 및 국가 경쟁력과 동일시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지 검토해볼 겨를도 없이, 세계 각국은 자국민이 자국 국경 내에서 창업하고 발전시킨 인공지능 기업이 하나라도 더 등장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 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적 경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불꽃 튀는 세계 경쟁 와중에 치러지는 대선이니, 앞으로 들어설 정부가 인공지능 기업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려 하는지 후보자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지당하다.
그러나 규제 완화(de-regulation)란 도대체 무엇인가? 일단 규제를 완화하면 이 나라의 인공지능 생태계는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운 것은 어째서 정부는 언제나 기업 육성과 규제 완화를 외치는데, 기업은 규제 좀 없애 달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규제 완화의 이상적 이미지는 흔히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경쟁이 유지되며 혁신적인 시장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시장 행위자들은 가격 메커니즘에 따라 국가의 간섭 없이도 자정작용을 거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이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비단 시장 실패 때문만은 아니다. 인공지능 기업 또한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요청하고 있는데, “인공지능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에 대한 전략적 혜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국 기업이 데이터, 고급 인력, 반도체, 인프라 등에 있어서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국내 기업을 적극 육성하고, 국가가 나서서 국내 기업의 인공지능 서비스를 적극 구매하고, 국내 기업이 해외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를 바란다. 이들의 요청을 가로막는 규제들만이 혁파되어야 할 규제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그러니 기업과 대선 후보자들이 이야기하는 규제 완화는 사실 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기존의 규제 체계를 정비하는 재규제(re-regulation)에 가깝다. 기존의 규제 체계가 세계 시장과 기술의 변화에 발맞추어 세련되게 정비하는 과정이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규제의 변화는 따라서 언제나 뒤늦고, 부족하다.
인공지능 생태계 조성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규제 완화는 보이는 바와 달리 시장이 자유화되기보다는 국가와 기업 간 결속과 협력이 강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하여 이번 대선에서 인공지능과 관련된 공약은 새롭게 정비될 과학기술 생태계의 규제들이 어떤 기업을 왜 보호해야 하며, 시민사회가 이러한 결속을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재규제는 단순한 기술 진흥을 넘어 민주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이루어져야 하며, 공익을 위한 책임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