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프랑스의 문학 살롱은 계몽된 사상을 전파하는 혁명의 요람이었다. 살롱에서 손님들은 당시의 시사, 철학, 문학에 대해 토론을 하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귀족적 사교에서는 문학적 오락이 핵심이었다면, 살롱에서는 자제력이 필수 자질이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손님을 존중해야 하며, 대화가 격렬해지면 살롱 여주인이 나서서 상황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계속 진행시키는 기술이 중요하였다.
살롱의 손님은 여주인이 엄선하여 초대하였다. 따라서 살롱 여주인의 권한과 영향력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편에서 랑부이예 부인이나 탕생 부인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들의 뒤를 이은 마담 조프랭(Geoffrin) 역시 그러하였다.
조프랭 부인은 부르주아 가문 출신의 재치 있는 여성이었다. 꽤 부유한 그녀는 일찍부터 자기 집을 문학과 예술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만들 길 열망하였다. 노년에 즐거운 사교와 명예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살롱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을 즈음 파리에는 유명한 살롱 여주인이 있었다. 탕생 부인이었다. 그러나 후자가 1749년 세상을 뜨자 조프랭 부인은 바야흐로 ‘조프랭 부인의 시대’를 열어 나갔다.
1699년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마리-테레즈 로데(Marie-Thérèse Rodet). 아버지는 파리 시의 회계 담당자이자 통나무 목재 관리인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고, 어머니는 파리 은행가의 딸로 화가의 재능이 많은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가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린 소녀 로데는 외할머니인 슈미노 여사에게 맡겨졌다. 외할머니는 손주를 예쁘게 여겨 교육을 시키고 회화 실력을 쌓도록 잘 보살펴 주었다.
로데가 열네 살이 되자 외할머니는 파리 민병대의 중령이자 장교인 피에르 프랑수아 조프랭과 결혼시켰다. 신랑은 가구 제작의 중심지인 포부르 생탕투안 지역에 왕립 거울 공장을 가진 사장이자 주주로 파리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 덕분에 그녀는 일찍부터 ‘마담 조프랭’으로 잘 알려졌다.
조프랭 부인은 왕비처럼 화려하게 살았지만 그러한 부르주아적 삶을 매우 지루해 하였다. 그녀는 안방마님으로 행세하기보다 살롱을 열어 정치인이나 외교관들과 사교하는 삶을 소망하였다. 드디어 스물여덟이 되던 1727년 그녀는 꿈을 실현시킬 첫 삽을 떴다. 파리의 중심지 생토노레 거리에 남편이 새로 지은 저택을 이용하여 첫 번째 ‘협회’를 설립한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가 하는 일에 다소 냉소적이고 사치스럽게까지 여겼다.

다행히 당대 유명한 작가 퐁트넬(Fontenelle)이 지원병으로 나서 그녀에게 탕생 부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조프랭 부인은 탕생 부인의 살롱을 자주 찾아가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롱 여주인의 소양을 쌓고 예의범절을 익혔다. 그녀는 문인, 장관, 대사들을 명예롭게 접대할 수 있었고, 파리의 권력층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모임에서 더욱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쉰 살이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유산으로 거울 공장을 상속받아 더욱 부자가 되었다. 그녀는 이 공장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살롱을 보다 고급지게 꾸며 나갔다. 그녀의 개인 저택은 절단석으로 지어진 루이 15세 시대의 아름다운 거주지로 일층과 이층 사이에 응접실을 넣어 고귀한 방을 만들었다. 높은 아치형 창문에는 아름다운 조명이 반짝였다. 이 살롱은 예술가, 사업가, 귀족뿐만 아니라 파리를 오가는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이는 당시 획기적인 일이었고 살롱의 방문객 수는 점차 늘어갔다.
1749년 탕생 부인이 눈을 감자 퐁트넬은 그동안 진행했던 ‘화요 모임’을 조프랭 부인의 살롱으로 가져왔고 이는 살롱 분위기를 더욱 활기차게 하였다. 그녀의 살롱은 사교적인 대화의 장소이자 연극과 음악이 공연되거나 시를 낭송하는 오락의 장소였다. 게임과 고량진미도 곁들여졌다. 조프랭 부인의 살롱은 다른 살롱과 달리 화가나 조각가, 즉 부셰, 그뢰즈 같은 판화가를 한자리에 모았다는 점이 특색이었다. 그녀는 이 예술가들의 그림, 조각상, 작품에 높은 가격을 지불하며 그들을 끌어들였다. 1750년부터 1770년까지 그녀는 60여 점의 그림을 의뢰하였다. 조프랭 부인은 예술가들을 사랑하고 환영했으며 예술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다.
그녀의 살롱은 무엇보다 백과사전파의 아지트로 프랑스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는 조프랭 부인의 살롱에 자주 나타났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출판 자금을 조달했던 그녀는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출판에도 자금의 일부를 지원하였다. 조프랭 부인은 25년 동안이나 계몽주의 사상의 발전에 동참함으로써 혁명의 횃불을 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조프랭 부인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 ‘문장의 여인’은 아니었지만 대화술이 뛰어났다. 화가 나티에는 일찍이 “조프랭 부인은 유쾌하고 고상한 얼굴, 빛나는 눈, 매력적인 입, 우아한 손과 둥근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가식도 없이 자신의 무지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라고 묘사하였다.

작가 페르낭 노지에르에 따르면 “문학 살롱을 운영하려면 여성은 지극히 무지해야 한다. 그래야 손님들과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프랭 부인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고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은 그녀의 집에 몇 권 밖에 없었고 그것도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그녀의 무지는 그녀가 교육받은 사람들의 대화를 즐기는 데 결코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올곧고 자연스러운 정신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었다.”
조프랭 부인은 프랑스 국경을 넘어 러시아 황후, 오스트리아 군주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폴란드 왕은 그녀를 ‘엄마(Maman)’라고 부를 정도로 국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월요일과 수요일 저녁 식사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위한 ‘쁘띠 만찬’을 조직하여 그녀의 살롱에서의 대화의 폭을 보다 경쾌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데팡 부인의 조카 쥘리 드 레스피나스(Julie de Lespinasse)가 자신의 살롱을 열어 숙모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 이는 파리에 괜찮은 살롱 여주인이 하나 더 늘어 살롱 문학이 번성하고 이어지길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프랭 부인의 살롱을 경멸하고 그녀를 ‘경박하고 수다스러운 여자’라고 부른 데팡 부인에 대한 통쾌한 복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