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남진은 올해 데뷔 60년을 맞아 전국투어 기념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마음이 고와야지’,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 함께’, ‘둥지’ 등 그가 부른 노래는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다. 영화도 여러 편 출연한 그는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가며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기도 했다. 대중가수는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80 나이에도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현역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나훈아는 작년 1월, 58년 동안 가수로 활동했던 무대에서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남진 보다 1년 늦게 데뷔한 그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 ‘울긴 왜 울어’, ‘잡초’, ‘테스형’ 등 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가왕으로 추앙받았다. 은퇴를 알리며 1년간 ‘고마웠습니다’ 라스트 콘서트 전국투어를 했는데, 마지막 곡으로 ‘사내’를 부르며, 은퇴 결심은 자기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결정이었다, 정말 고마웠다고 인사하면서 오열했다.
가요계의 레전드로 한 시대를 양분했던 두 사람은 누구 이름을 먼저 부르는 것에 민감할 정도로 라이벌이었고, 사실 그들 팬들이 더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은 딱 한번 한 무대에 선 적이 있다. 데뷔 20년이 지난 1987년, KBS2 스타데이트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여 마지막에 듀엣으로 Let it be me를 불렀는데, 서로 다른 특성으로 노래하는 두 사람의 화음이 긴장 속에 이어졌고,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훈아의 은퇴 소식을 들은 남진은 그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타고난 트로트 가수라고 칭찬했다. 또 두 사람은 라이벌 구도 덕분에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하면서, 라이벌 구도는 연예계 비즈니스 차원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정치사에도 라이벌로 부각되는 두 사람이 있다. 이미 고인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들이다. 1929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최연소 국회의원’, ‘최다선 9선 의원’, ‘최연소 총재’라는 정치이력이 붙어다녔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은 그는 1970년대 중반 유신 치하에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투쟁하여 민주화를 이뤄냈다. 분열된 야당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1990년에 3당 합당을 결행했고,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24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한 김대중은 3차례 대선에서 낙선한 후 김종필과 DJP연합을 이루어 1997년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 라이벌 김영삼에게 패했을 때, 그는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년 7개월 만에 돌아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로 은퇴 번복에 대한 논란을 잠재웠다. 투옥과 사형선고 등 군부의 탄압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을 핍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을 평가하며 화해를 모색했다.
김대중은 치열한 연구와 수사로 언제나 대안을 제시하는 편이었고, 김영삼은 상황판단이 감각적으로 빠르고 어떤 위협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기백이 있었다. 민주화 투쟁의 길을 같이 걸어온 두 사람이지만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열망했던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 가슴에 두고두고 남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가 광폭 행보를 이어가자 민주당과 혁신당 간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후계자 한 사람이 더 늘어난 이 구도는 대통령이 다분히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 논객들도 있다.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을 정신분석학으로 설명한 김용신은 그의 저서 '지도력의 허상'(2016)에서 우리들의 이상이나 희망사항에 근거한 리더십은 실질적으로 허상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리더십은 결국 국민의 판단과 선택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