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 ‘노동’의 기록은 대체로 남성의 현장에서 쓰였다. 전쟁터, 공장, 광산, 철도 위에서의 노동은 굵은 글씨로 남았지만, 집 안에서 이루어진 여성의 일은 오래도록 노동의 이름을 얻지 못했다. 빨래, 청소, 요리, 육아, 간병처럼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일들이 ‘도움’이나 ‘역할’로 축소되었고, 임금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제의 바깥에 놓였다. 기록되지 않으니 인정도 따라오지 않았다. 여성의 노동은 사랑으로 치환되었고, 헌신이라는 말 아래 가려졌다.
그러나 가사와 돌봄은 개인의 선의를 넘어 사회 전체를 떠받쳐 온 기반이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아픈 이를 돌보고, 가족의 일상을 운영하는 일은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였고, 시장의 움직임을 뒷받침하는 숨은 인프라였다. 누군가 출근할 수 있었고, 누군가 가게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돌봄의 그물망 덕분이었다.
페미니즘은 이 ‘보이지 않는 노동’에 이름을 돌려주었다. 특히 제2물결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 선언하며 가정의 일이 곧 공적 노동임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수많은 여성은 오늘도 일터에서는 직장인, 집에서는 주부로서 ‘이중 노동’을 감당한다. 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되고, 대가를 요구하는 일은 미뤄진다.
돌봄은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서로를 지탱하는 방식, 생명 공동체를 유지하는 최소 단위의 노동이다. 그러므로 돌봄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사회적 기여다. 이 기여는 성별을 초월해 누구나 수행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사실 ‘여성의 노동’처럼 성별로 구획하는 말 자체가 성평등의 관점에서는 한계를 드러낸다. 성평등 사회에서 핵심은 ‘누가 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기여했는가?’이며, 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측정해 정당하게 보상하는 질서—바로 기여자본주의(contributalism)의 요체가 여기에 있다.
초고령 사회로 향하는 지금, 돌봄의 수요는 커지고 공급은 줄어든다. 최근 대선 보도에서 2030 유권자 규모가 처음으로 6070보다 작아졌다는 사실은, 젊은 세대가 기존의 방식대로 돌봄을 전담하리라는 통념을 흔든다. 더욱이 사람의 노동 일부는 이미 기계로 이동하는 국면에 들어섰다. 그럴수록 노동을 ‘기여’로 재정의하는 일은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공존·경쟁하는 환경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무엇이 대체 가능하고 무엇이 대체 불가능한지를 가르는 기준이 곧 ‘기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사회는 돌봄 같은 감정 기반의 기여를 더 이상 주변부에 머물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자동화가 진전될수록 감정노동의 가치는 오히려 상승한다. 인간만이 건넬 수 있는 온기, 관계 맺음, 책임의 감각은 어떤 기술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돌봄은 기술의 그림자 바깥에서, 대체 불가능한 핵심 기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노동의 미래는 곧 인간관계의 미래다. 우리는 노동을 생산의 수단에만 묶어두지 않고, 공동체를 유지·확장하는 기여의 언어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기여로 사회적 권리를 획득하고, 돌봄이 사랑의 이름만이 아니라 정당한 보상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사회—그 길이 더 인간다운 미래를 여는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