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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희의 향기로운 술 이야기] 중양절, 가을의 정수 속 국화 향 담은 술잔

 

절기는 농경사회에서 삶의 리듬이자 지혜의 근간이었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업을 조절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음력 9월 9일, 숫자 9가 두 번 겹치는 이날은 '중양절(重陽節)'이라 불리며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동양 철학에서 홀수는 양(陽)을 뜻하고, 그중 가장 큰 수 9가 겹치는 날은 양기가 극에 달하는 날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나친 양은 재앙을 부른다’는 믿음에서, 이를 제어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풍속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풍속이 바로 ‘등고(登高)’, 즉 높은 곳에 오르는 행위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 날 산을 오르며 잡귀를 물리치고 몸과 마음의 맑음을 되찾고자 했다. 가을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기도 하고, 수유(茱萸) 나뭇잎을 담은 주머니를 지니는 풍습도 있었다. 수유는 독을 풀고 재앙을 막는 약초로 알려졌으며,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한 도인이 제자에게 “9월 9일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고 수유 주머니를 지니라”고 권했고, 이를 따른 가족은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민간 신앙과 결합해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

 

중양절은 절기상 ‘한로(寒露)’와 겹친다. 찬 이슬이 내리고, 국화가 절정에 이르며, 단풍이 깊어지는 때다. 농촌에서는 추수를 마무리하며 일 년의 결실을 마주하고, 도시에서는 가을의 빛과 냄새가 일상을 감싼다. 국화는 중양절의 상징이다. 늦가을까지 꿋꿋이 꽃을 피우는 국화는 고결함과 장수를 의미하며, 국화전·밤떡·유자화채 같은 계절 음식을 통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이날 빠질 수 없는 풍류는 바로 국화주다. 찹쌀과 누룩에 말린 국화를 넣어 빚거나, 이미 빚어 놓은 술에 국화 주머니를 매달아 향을 입히기도 한다. '본초강목'에는 국화가 두통을 완화하고 눈과 귀를 밝게 한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약효보다 중요한 것은 술잔에 스며든 깊은 가을의 향기다. 국화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닌, 계절의 기운을 담아내는 ‘가을의 약술’이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어 가을 축제의 시음주로 사랑받고 있다.

 

중양절은 제사의 날이기도 했다. 후손이 없는 조상이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을 기리는 무후제, 또는 ‘99제(九九祭)’라는 의식을 통해 기억과 예를 다했다. 또한 어르신에게 음식을 대접하거나 함께 산행을 하며 가족과 이웃 간의 정을 나누는 명절이기도 했다. 단지 재앙을 막는 날이 아니라, 공동체의 온기와 화합을 다지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중양절은 그 의미조차 찾아볼 수 없다. 공휴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현대인의 삶 속에서 계절과 절기의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농사와 계절이 삶의 중심이던 시절과 달리, 인공조명 아래 실내에서 보내는 일상은 절기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그럼에도 중양절은 되살릴 가치가 큰 절기다. 국화 향 가득한 가을날, 가족과 함께 걷고 국화차나 국화주 한 잔을 나누는 소박한 순간이야말로 바쁜 일상 속 숨결 같은 여유를 선사한다. 최근 들어 전통주 복원과 절기 문화 체험이 점차 늘면서 중양절의 의미도 다시 조명되고 있다. 지역 축제나 전통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국화 향기와 함께 중양절을 체험하는 기회도 많아졌다.

 

중양절은 단지 옛사람들의 풍속이 아니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사는 삶의 지혜, 이웃과 나누는 정,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여백이 담긴 날이다. 가을의 깊이를 머금은 국화 향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잠시 멈춰 선다. 국화 한 송이와 그 한 잔의 여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을의 지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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