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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섭의 이심전심(以心傳心)] 한류를 넘어 정체성 전략으로

 

21세기에는 국가의 힘이 영토보다 이미지에서 드러난다. 한 나라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어떤 이미지를 세계와 공유하느냐가 곧 그 국가의 국격(國格)이자 정체성이 된다. K-팝을 기점으로 드라마, 영화, 뷰티, 푸드, IT, 언어, 웹툰, 문학, 패션, 게임, 교육, 국악, 종이접기 등으로 끝없이 확장되는 K-콘텐츠는 이제 더 이상 글로벌 문화 변방의 외침이 아니다. 시각적 경험으로서의 외적 이미지와 즉각적 공감으로서의 내적 이미지가 결합된 K-컬처는 서구 중심 대중문화와 대등하게 경쟁하고 협업하며 강력한 소구력을 지닌 ‘관계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상징적인 장면들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골든글로브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시작으로, 그래미의 ‘비주얼 미디어 최우수 주제가상’, 나아가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까지 휩쓸며 전례 없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여기에 오는 3월 21일, 군 복무를 마친 방탄소년단(BTS)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26만여 아미(ARMY)들과 함께 ‘아리랑(ARIRANG)’을 떼창할 예고된 풍경은 정점을 찍는다. 이는 한국 고유의 서사와 인류 보편의 감성이 결합한 K-콘텐츠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전 세계가 공유하는 하나의 ‘보편적 이미지 언어’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거대한 문화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체감하고 반응하는 집단이 있다. 전 세계 708만 재외동포 가운데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40대 미만의 ‘차세대’다. 이들에게 한국 문화는 더 이상 교과서 속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유튜브와 OTT, SNS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원근 각지에서 자신의 뿌리와 실시간으로 연결된다. 한국적 색채와 보편적 정서가 결합한 한류는 이들에게 한국을 ‘설명’하기 이전에 ‘체득’하게 한다. 혈통이나 국적, 언어 능력을 앞세우지 않아도 ‘코리안’이라는 소속감과 ‘코리아’에 대한 친근감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키는 강력한 정체성 아이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이 이러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책 목표와 국정 과제에 대한 근본적인 ‘영점(零點) 조정’이 필요하다. 그동안 한류는 세계인에게 ‘재미 있고, 혼종적이며, 현대적이고, 역동적인 한국 문화’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동포 차세대 개개인의 삶과 미래에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현지 출생 세대가 주류가 된 동포 사회를 어떻게 지속 가능한 파트너로 포용·육성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 현재의 한류는 문화산업 전략으로서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를 국가 백년대계인 ‘정체성 전략’으로 전환하는 세밀한 로드맵은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최근 재외동포청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재외동포를 관리와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한류 전파자이자 민간 외교관으로 봐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의미 있는 인식 변화다. 그러나 베트남의 K-마트나 해외 각지의 한류 페스티벌 사례를 거론하는 수준만으로는 정체성 형성의 결정적 시기를 지나고 있는 차세대 동포들의 마음과 발걸음을 사로잡기에는 부족하다.

 

정부의 ‘제1차 재외동포정책 기본계획’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한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정책의 언어는 여전히 ‘세계한인경제인대회’, ‘수출입 EXPO’, ‘바이어 매칭’, ‘재외국민 우편투표 도입’ 같은 정치·경제 지표에 머물러 있다. 세계한인회장대회나 세계한상대회 주최권을 민간에 이양하는 정도의 행정적 변화만으로는 기존 네트워크 밖에 존재하는 ‘익명의 유력 동포’나 ‘글로벌 시민으로 성장하는 차세대’의 실태와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경제적 동기가 아니다. 국적과 거주지를 넘어서는 심리적 소속감이며 자신의 자아실현과 연결되는 한민족 구성원들과의 ‘글로벌 상생’이다.

 

이미지는 강력하지만 동시에 휘발되기 쉽다. 소비되는 이미지가 삶의 가치와 행동 철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 자긍심은 일회성 환호에 그칠 뿐이다. 재외동포 차세대를 단순히 K-콘텐츠를 전파하는 또 하나의 소비 집단으로 바라보는 근시안적 시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들이 대한민국과의 다양한 연결을 바탕으로 인류 공동 번영과 세계 평화 증진에 기여하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적 공간을 넓혀야 한다.

 

결국 과제는 분명하다. K-컬처의 폭발적 에너지를 단순한 문화 소비의 차원을 넘어 ‘정체성 전략’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케데헌의 연속 수상과 BTS의 컴백이라는 화려한 사건도 그저 문화적 성과로 소비할 것이 아니라, 인종과 국적, 종교와 세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대동(大同)의 자산’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K-이미지의 중심축으로 성장한 한류가 동포 차세대와 세계인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으려면, 그 바탕에는 ‘세계시민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단단히 뿌리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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