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당 대표를 뽑는 6·11 전당대회가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 오랫동안 ‘수구·꼰대’ 프레임에 갇혀 있던 국민의힘에 30대~50대 초반 소장파의 선전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36세에 국회의원 경력이 없는 이준석 전 최고위원의 강풍은 청량감을 더해줬다. 그런데 난데없이 당내에서 이 전 최고위원을 겨냥한 ‘계파·배후설’이 집중 제기돼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경선이 ‘세대 대결’ 구도로 가는 것을 막아보려는 다른 후보 진영의 고육지계로 보인다. 하지만 경선에 나선 중진 후보들이야말로 그동안 당내 계파와 조직의 토양위에 여기까지 왔고, 계파는 정당정치의 기본 작동 원리인 것을 누구보다고 잘 알고 있는 인사들이다. 그런데도 판세가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뚜렷한 증거도 내놓지 않고 진흙탕 싸움을 걸어온 것은 정치 선배 답지 않은 옹졸한 처사다. 나아가 지난 4·7 재보선 이후 나타난 변화와 쇄신의 민심을 정면 부정하는 것으로 자칫 당 전체를 공멸로 이끄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이런 구태의연하고 혼탁한 정치가 바로 세대교체가 필요한 가장 큰 첫 번째 이유다. 둘째 세계적으로 기업이든 정치권이든 물리적 나이의 잣대는 갈수록 퇴색되는게 시대적 흐름이다. 의학과 IT(데이터 축적)의 혁명이 남녀노소의 지적·신체적 벽을 허물고 있다. 국민의힘 당권 경쟁에서 신예들이 집중 조명을 받자 정치권 일각에서 ‘경륜’ ‘장유유서’ 등으로 견제구를 던지고 있다. 마크롱(프랑스 39세)·캐머런(영국 43세)·클린턴(미국 46세)오바마(미국 48세)·아던(뉴질랜드 37세)을 포함해 미국과 유럽 등에서 30~40대에 당권을 넘어 국가 최고지도자(대통령·총리) 반열에 오르고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끝냈거나 수행중인 사례가 허다하다. 우리의 경우는 1970년 당시 김영삼(42세)·김대중(46세) 전대통령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세대교체론을 처음 제기했다. 이후 간헐적으로 변화와 쇄신, 정풍의 바람이 있었지만 미풍에 그쳤다. 한국 정치의 개혁, 세대교체는 특히 중앙당, 중진 인사들에게 집중된 공천권과 유교적 권위주의 문화 등이 발목을 잡아온 경향이 크다. 그러다보니 고여있는 물처럼 정치는 국민에게 피로감을 누적시키며 혐오 대상이 된지 오래다. 2030 세대를 비롯한 국민들은 4.7 재보선을 계기로 정치권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졌고 그 민심이 이번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서 소장파들의 돌풍으로 나타난 것이다. 대선을 앞둔 정당에게 최선이 아닐 수 있지만 세대교체라도, 아니면 뭐라도 변화를 하라는 명령이다. 태풍은 피해도 발생하지만 고여있는 썩은 물이나 녹조·적조, 깊은 바닷속을 뒤집어 건강한 생태계를 다시 부여한다. 모처럼 야당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바람이 우리 정치권 전반에 적폐·구태를 날려버리는 촉매제가 됐으면 한다. 끝으로 일각의 우려대로 세대교체가 최고의 선은 아니다. 나이가 젊다고 경륜과 지혜에 흠결이 있다면 용인될 수 없다. 미국 영국 등 글로벌 젊은 지도자들에게서 보듯 국정 능력이나 정치력 역량은 나이보다는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에 달렸다. 젊은피가 진정한 세대교체를 주장하려면 ‘실력교체’임도 증명해야 한다.
탄소중립 정책은 단순한 계몽 운동이 아니라 경제 사회 운영체제에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에서의 탄소 배출량을 계측하고 라벨링을 하여 그 가치를 시장 경제 체제에 편입시키는 작업이 그중 하나이다. 제품의 원재료 품질과 소비자의 선호 이외에 친환경성(탄소 배출량으로 계량화된)도 제품 가격에 반영됨으로써 경쟁력에 직접적 영향을 주게 된다. 이 계량화를 위한 기본 개념이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이다. 탄소 발자국이란 제품 제조, 유통, 사용, 폐기까지 그 제품의 생애 주기에 발생한 그린하우스 가스 총량을 이산화탄소량으로 환산한 양이다. 이 탄소 발자국은 기존의 경제 및 무역 체제를 바뀌게 할 탄소세 및 탄소 국경세의 근원이다. 탄소세는 기존에 화석연료에 부과되는 물품세인 에너지세와 달리 화석연료의 생산과..
말은 그 사람의 도덕과 인품을 말해준다. 혀는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와 같습니다. 또한 혀는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 버리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남의 흠이 눈에 띄는 것은 자기 자신의 흠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을 비난하면서 자기가 방금 비난한 잘못을 똑같이 저지르기도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쉽게 유혹에 빠지고 남의 악을 모방하게 된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험담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결점을 친구에게도 적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의 행위 속에 좋지 않은 점이 있음을 알아도 그것을 들춰내서는 안 된다.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될 수 있는 한 말리도록 하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가장 뿌리치기 힘든 유혹은 친구에 대한..
"왜 어린 애들에게 미사일을 쏘아 죽이려 하는 거죠? 정말 불공정합니다.”(팔레스타인 소녀 나딘 압델 타이프가 지난 15일 중동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점점 팔레스타인의 숙명에 익숙해지고/ 우리 삶이 감옥이 되어 갔다는 것/(....)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이미 그때 내 삶은 죽음과 손잡고 있었으니까"(2011년 출간된 정한용 시인의 『유령들』에 실린 시 '레퀴엠' 중에서) "이 무지막지한 이스라엘 군인 놈들아/ 내 자식 내 남편 내놓아라./ 이 갈갈이 찢어 죽일 아브람, 모세, 다윗, 솔로몬의 새끼들아/ 통곡의 벽 안쪽은 그 벽 밖의/ 통곡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외신은 울음의 전도체인가, 아닌가"(1983년 출간된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실린 시 '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 중에서) 2021년, 2011년, 1983년. 팔레스타인 소녀..
인간의 지적 활동은, 종종 진리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은폐하는 데 이용되곤 한다. 재판의 목적은 현재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 또한 수준 낮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박해하고 처벌한다. 나는 농부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만큼 많이 배우지 않았으므로. (몽테뉴) 도대체 왜 그 사람은 종교적, 정치적, 학문적으로 그토록 괴상하고 불합리한 입장을 옹호하는 것일까 하고 참으로 이상하게 여겨질 때가 종종 있지만, 잘 살펴보면 그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호신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하려 할 때는, 그 행위가 나쁜 행위라는 것을 믿어도 된다. 양심의 결정은 항상 간단명료하고 솔직하다. 영혼이 구원 얻기 위해 먼저 도덕적인 인격의..
지난해 1월 경기도 김포시에서 일가족 3명이 숨진 일이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코로나19 이후 더욱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62세 어머니, 남편과 별거 중인 37세의 딸과 그의 8살 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집 안에서는 “삶이 힘들다”는 등 처지를 비관하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이들은 극심한 생활고로 3개월간의 아파트 관리비 98만4000원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이들 가족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올해 3월에도 충청북도 청주에서 40대 부부와 4세와 6세 아이 등 일가족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생활고로 인해 가족을 동반한 채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오죽 힘들었으면 막다른 길을 갔으랴. 특히 스스로 선택권조차 없는 어..
나는 내 앞의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이러저러한 자신의 증상을 호소한후에 잠을 계속 잘 못자서 그런가. 하는 혼잣말을 하는 그녀에게 말이다. 5일전부터 소변이 1,2시간에 한번씩 자주나와서 모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미세한 혈뇨가 보인다고 간단한 처방을 받았는데 남편이 한의원가서 보약지어먹고 빨리 회복하라고 성화여서 한의원에 들른 차였다. 나는 혈뇨가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에 대해 말하며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혈뇨일지라도 지금부터 몸을 잘 돌볼 것을 일렀다. 어느식당에서 서빙을 하는일을 하루 종일 소변생각도 잊을 만큼 바쁘고 고되다. 열심히 해서인지 손님들이 많이 좋아해줘서 일할 때는 힘든줄 모르다가 밤이 되면 넘 피곤하데 밤에는 편치 않아 잠을 잘 못잤다고 하였다. 검은 흙빛의 얼굴로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표정은 밝은..
오마이뉴스와 조선일보가 오랜만에 동행했다. 오마이뉴스가 5월 14일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생명이 위험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2050년까지 30년간 30억 그루의 나무를 심어 탄소 3400만톤을 흡수하겠다”는 산림청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골자였다. 드론으로 촬영한 2분 36초짜리 동영상을 포함해 18장의 사진이 곁들여진 기사였다. 그 충실도는 대단히 높았다. 오프라인 언론은 시도하기 어려운 장문의 심층고발 물이었다. 3000건이 넘는 댓글(포털 다음 기준)로 독자의 관심도 뜨거웠다. 조선은 다음날 15일(토)자 2면 톱기사로 '탈원전 文정부, 멀쩡한 산 밀어버렸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를 시작했다. 이틀 후 월요일자(16일 신문 일요일자 신문 휴간)에선 '산으로 가는 文정부 탄소정책'이란 제목의 1면톱 기사로 강도를 높였다. 아울러 3면 전체를 할애해 비판했다. 이후 금요일까지 매일 기사를 내보냈다. 근래에 보기 드문 1주일간 계속된 집요한 비판기사였다. 두 언론의 기사는 독자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코로나 이후 부쩍 는 등산 인구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산림청의 ‘30년 이상된 나무가 탄소흡수량이 떨어지니 베어내고 새 나무를 갈아 심는다’는 보도자료 내용이 독자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또 고속도로변의 울창한 산이 흉측한 민둥산으로 변한 기사의 사진은 공감을 더했다. 급기야 산림청은 이미라 산림정책국장 명의의 장문의 반론보도문까지 냈다. 오마이뉴스는 반론보도문을 그대로 실었다. 반론을 반영한 점이 돋보였다. 그러면서도 후속기사를 준비하겠다고 예고했다. 언론의 정도를 걷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두 기사의 파장 때문이었는지 중앙일보는 지난 22일 환경전문기자가 '산림청 관련 보도의 오해와 진실'이란 장문의 인터넷판 기사를 게재했다. MBC는 이보다 앞서 지난 18일 '조선일보 기사는 사실일까?'라는 제목으로 팩트체크까지 했다. 필자도 기사들을 샅샅이 점검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조선일보는 4월 28일자 E01면에 '30년간 30억 그루 심어 탄소 3400만t 줄인다'는 제목으로 같은 사안에 대해 찬양 일색의 기사를 실었다. 20일도 지나지 않아 보도 방향이 180도 돌변했다. 지난 1주일간 보도했던 기사의 순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한국은 언론신뢰도 세계 최하위 국가다. 이런 언론의 이중성은 신뢰를 갉아먹는 좀이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조차 ‘그때그때 달라요’다. 언론은 복잡한 사안들에 대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판이어야한다. 그게 언론서비스다. 독자가 ‘이 보도 믿어도 되나?’라는 의문을 갖고 접근하면 이미 언론이 아니다. 산림청 광고를 기사로 둔갑시킨 가짜기사가 빚은 결과다. 지금의 한국 언론이 그 지경이다. 산림청의 30년간 30억 그루 나무심기 보도를 보면서 미디어 공부는 필수인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전도자 바울이 드로아에 왔다. 드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구 도시로, 트라야누스 황제가 만든 도수교(導水橋)가 명물이었다. 초대교회 풍경이 대개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아무개의 집에서 일요모임이 열렸다. 밤이 깊도록 바울의 강론이 이어지는데, 한 청년이 3층 창문에 걸터앉아 몹시 졸다가 그만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강론이 중단된 건 당연지사.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청년을 일으키려 하지만, 아뿔싸, 숨을 쉬지 않는다. 어쩌자고 이 청년은 그토록 위험한 장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을까? 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일찌감치 모임에 왔더라면 안전한 자리를 선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늦게 온 탓에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쳐도, 얼마나 정신없이 졸았기에 땅으로..
죽어가는 자의 말과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그에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하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추한 죽음은 잘 살아온 자신의 삶에 상처를 내고, 깨달음을 얻은 의연한 죽음은 이전의 나쁜 삶을 보상해준다. 무대장치가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완전히 바뀔 때, 우리가 그때까지 현실 속의 장면처럼 생각했던 것이 한탙 장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는 죽음의 순간,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무대장치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가 그 순간 이해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뭔가 다른 것을, 살아 있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뭔가를 알게 되어, 그것에 영혼이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죽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