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 후, 본인이 영조의 적통(嫡統)임을 나타내려는 방안으로 영조의 어제각(御製閣)인 주합루(宙合樓)를 가장 먼저 건축하였다. 사묘건축의 대표인 종묘는 1층이지만 모두 원기둥이며 공포는 일출목 이익공으로 위계가 어느 정도 높은 편이다. 한편 주합루는 중층이지만 외부에 각기둥을 사용하고 공포는 출목 없이 처리하여 검약하게 보이고 있다. 전편에 이어 주합루만의 재미있는 점들을 찾아보자. 기둥=통재기둥(通材柱-1층에서 2층까지 하나의 부재로 된 기둥)을 사용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보통 중층건물 내부공간에 층(層)구분이 없는 경우에는 내부기둥을 한 부재의 기둥을 사용하지만, 2층에 바닥이 있는 경우에는 층별로 별도의 기둥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통재기둥이 구조적으로 유리한 것은 알지만, 이렇게 길고 큰 나무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합루에서는 30개의 모든 기둥을 통재기둥으로 사용하고 있어 외관적으로는 검약하게 보이나 많은 공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난간=난간의 사용기법도 특이하다. 보통 난간의 위치는 기둥의 선(線)보다 외부로 더 돌출되어 설치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둥과 같은 선(線)에 설치되어 난
회한과 분노를 못 이겨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는 고흐의 일화는 예술과 광기의 섬뜩한 관계를 일깨워준다. 고흐의 광기는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어서 ‘까마귀가 있는 밀밭’이나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작품들은 누구하나 없는 적막한 풍경을 그렸지만, 캔버스는 이글거리는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허공은 대기의 흐름도, 바람도 아닌 기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가득 차 있고, 까마귀들이 날고 있는 밀밭이나 캔버스를 수직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나무, 산과 집들도 진짜로 꿈틀대고 있는 것처럼 매우 역동적이다. 두 작품은 각각 1890년과 1889년에 완성된 것으로 이 시기는 고흐가 자살 직전 샹레미 정신병원에 머물렀을 때였고,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도 이처럼 우울과 광적인 에너지를 잔뜩 머금고 있다. 고흐 말고도 뭉크, 달리, 카라바조, 피카소 역시 우울과 광기를 지녔던 예술가들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견디기 힘든 생의 비극들을 겪기도 했지만, 어쩌면 예술이라는 인간의 활동자체가 광기와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진짜 정신질환자이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살면서 한 번도 미술교육을 받은…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굴을 먹어라, 그럼 더 오래 사랑 하리라(Eat oyster, love longer)’ 굴과 정력의 상관관계는 의학적으로도 오래전 증명된바 있다. 굴에는 칼슘뿐 아니라 다른 식품에 비해 아연이 풍부하다. 그리고 아연의 역할을 알고 나면 곧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력이 세다는 것은 ‘정자가 왕성히 만들어 진다’는 말과도 같다. 아연은 정자를 만드는데 절대 필요한 요소다. 굴이 바로 이런 아연의 보고(寶庫)니 사랑과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루 굴을 50개이상 즐겼다는 전설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그보다 세 배나 되는 굴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도 굴을 꼭 챙겨먹었으며 고대 로마의 황제들도 굴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굴이 남성들의 원기를 높여준다는 사실, 오래전부터 잘 알려졌던 모양이다. 날것을 잘 먹지 않는 서양서도 예부터 굴만은 생식으로 즐긴다. 보통 9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나는 굴을 제철 음식으로 친다. 그들이 기준으로 삼는 것은 월을 지칭하는 영문표기에 알파벳 ‘R’이 들어가는 달에 굴을 먹어야 제 맛 이라는 논리다. 봄에서 여름까지가 산란기여서…
paul /김명철 오랜 시간을 맑게 살아내고 있는 사랑의 뒷모습 투명한 무늬의 그림자가 뒤를 따르는 사랑의 뒷모습 똑같은 일을 똑같은 동작으로 해내고 있는 사람 공장 철문 옆 기름때 닦여진 나사더미에 사랑은 쌓이고 기름때 묻은 손과 발에도 모자도 없는 머리 위에도 - 시집 ‘바람의 기원’ /실천문학·20015 경건함이란 어떤 모습일까?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선뜻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변함없이 똑같은 일을 똑같은 동작으로 오래 해내는 사람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도 남들이 다 기피하는 하찮은 일을 아무런 불평 없이 오래 할 수 있다는 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동은 정신을 정화한다는 의미에서 오랜 시간을 맑게 산 탓에 그림자도 투명한 그런 사람을, ‘사도 바울’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사람, 우리는 그를 성자라 불러도 될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최기순 시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한국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자정께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투병생활을 수 년 간 해오면서도 최근까지 여야와 국민의 화합을 강조하며 작금의 정치상황에 안타까워했던 분이다. 누구나 한번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이치이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정치사적 의미는 대단한 것이어서 안타깝다. 박근혜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매우 큰 충격을 받고 비통해했다고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로써 2009년 노무현 김대중 등 대한민국의 두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잃은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마저 영면했다. 정치인 김영삼은 암울했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온 몸으로 권위주의와 독재에 항거하며 늘 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고 최초의 문민정부를 탄생시켜 이땅에 항구적인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정치 풍운아였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군부내에서 정치집단화한 ‘하나회’의 싹을 완전히 도려냄으로써 정치군인들이 발딛고 섰던 토대를 허물어 내고 이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초석을 깔았다. 경제분야에서는 전격적인 금융실명제를 발표하여 경제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한계에 다다른 관주도, 국
참 신선한 행사다. 연천군 DMZ 일원서 열린 ‘나라사랑 DMZ체험캠핑’ 이야기다. DMZ에서 캠핑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했다. 올해가 광복과 분단 70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고 민족이 얼싸안고 잘 살아갈 줄 알았는데 열강들에 의해 남북이 분단됐다. 이어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비극 6.25 전쟁이 발발했다.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고 우리는 아직도 분단의 비극 속에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 휴전선 남북으로 비무장지대 DMZ가 형성돼 있다. 이곳에서 20일부터 22일까지 2박 3일간 ‘나라사랑 DMZ체험캠핑’이 열린 것이다. 분단 비극을 품은 정소이긴 하지만 그래서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DMZ가 품은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경기도와 연천군이 주최하고 경기관광공사가 주관한 행사로서 경기북부지역의 체류관광 활성화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른바 공정캠핑이었다. 이 행사에 참여한 400여명의 캠퍼들은 현지 상점을 이용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DMZ일대의 자연·역사·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DMZ 관광도 접목했다. 주상절리와…
하늘 맑은 11월 초입, 극락전 마당으로 우수수 낙엽소리 밟히고 있었다. 스치는 바람에도 온 몸 각을 세우고 바스락거리는 한 때의 청춘을 몸에 지녔던 마른 나뭇잎. 그 몸의 아우성을 들으며 올라선 법당 안에서는 이미 와글와글 수능기도 소리 넘치고 있었다. 합장하고 무릎 꿇은 나와 그들이 올리는 이 간절한 기도의 뿌리는 무엇일까. 그 뿌리에 다닥다닥 매달려있는 무엇을 달라는 소리.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그 무엇에 또 다른 무엇이 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니 그 또한 욕심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자야는 온 몸으로 내려놓을 줄 알았지만 나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 욕심 말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안 되는 줄 알면서 헛물이라도 켜보는 상상속의 욕심에서부터 하나라도 더 갖고 싶은 물욕까지. 어쩌면 나는 그 샘솟듯 피어나는 욕심의 근원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한성대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올려다본 담장 높은 집들의 정원은 왜 그리도 멋있었는지 아니 위압적이었는지. 그곳 테라스 어딘가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여인의 모습이 오롯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건 풀풀 냄새나는 내 욕심이 여전히 발효 중이라는 말이다. 쉽게 포기
고대부터 내려오는 한국인의 몸 문화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무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무덤벽화 중 무용총의 수박(手搏)하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이 마주보며 다리를 구부려 낮은 자세를 취하고 손을 뻗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무예 대련의 형태인 택견의 견주기나 태권도의 겨루기를 할 때처럼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돈다. 역시 고구려 무덤벽화 중 안악 3호분의 수련하는 모습 역시 비슷한 형태로 당대의 무예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각저총에는 두 사람이 요즘의 씨름하는 모습처럼 서로 몸을 맞대며 허리의 삿바를 붙잡아 넘어뜨리려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씨름 역시 고대부터 내려오는 맨손무예의 일종으로 상대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관절을 꺾거나 조이는 유술기법을 담고 있다. 이 그림에는 심판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놀이를 넘어 경기로서도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오른편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면 메부리코를 가진 서역인으로 이미 고구려시대에도 세계 여러 민족들의 문화를 공유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충청도 은진현과 전라도 여산군의 경계 지역인 작지골에서 해마다 백중(白中-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태어나며 반드시 죽는다’ 생과 사를 오고 가는 인생의 명제다. 어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 했다. 이같은 인생 순리에 따라 본향으로 돌아 간 것이다. 사람은 죽기 까지 많은 것을 남기고 간다. 한 평생 정치인으로 살아온 김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정치사의 거목이었던 만큼 그 위상에 걸맞는 다양한 ‘헌정사상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 시작은 1954년 만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부터다. 김 전대통령은 3대 국회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당선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의원직 제명도 헌정사상 최초로 당했다. 1979년 제1야당의 당수로서 미국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철회’를 요구 했다가 국회에서 제명 당 한 것.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라며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최장 단식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5월, 가택연금후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 게 그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이 단식 1주일
깨어진 은사발 /이재무 제사를 지낸 다음 날 식전이면 엄닌 내게 심부를 시키셨다 대추 밤 사과 배 감 시루떡 인절미 조청 등속이 담긴 은사발 양손에 받쳐 가슴에 품고 연이네와 당숙네 먼 일가뻘 은범 아저씨네로 사방 시오리 돌고나면 두 다리 뻐근하고 등허리 대활처럼 휘어졌지만 마음의 풀밭엔 기쁨의 이슬이 영글게 맺혀 있었다 은사발 돌리면서 팔뚝과 장딴지 가쟁골의 칡뿌리로 굶어져 갔고 신발의 문수 몇 번 바꾼 이제는 책보 들던 손으로 때묻은 서룰를 들고 돈을 세다가 마음과 몸 밀물 앞에 모래탑처럼 무너질 때면 그 날의 은사발 그립고 간절해져서 고향에 달려가지만 어디에도 은사발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 홍수가 났던 지난 해에는 먼 마을에서 온 구호물자 앞에서 이웃끼리 얼굴 붉히었단다 시인이 제사를 지낸 가족사를 본다. 너나없이 경쟁의 속도전에서 시달리고 있다. 들에 핀 꽃 한송이, 길가에 뒹구는 돌맹이 하나에 맘을 뻬앗길 여유가 없다. 현실로 돌아보면 구슬픈 시절이 돌아온다. 누구나 고향산천에 담은 냄새가 있고 그 냄새는 지우랴 지울 수 없다. 새벽녘 먼동이 터오기 전 간간히 들려오던 부엉이 울음소리도 그칠 쯤 이면 시골밥상의 연기는 오래전 비워있고 늦은밤 잠자리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