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북한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도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허둥지둥 대처하는 정부 당국의 태도는 국민들의 불안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대놓고 러-우크라이나 전쟁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서민들의 일상의 대화에서 잠재적인 전쟁 공포심을 엿볼 수가 있다. 특단의 대책을 시급히 내놓아야 할 시점이다. 명의(名醫)는 정확한 병의 원인에 대한 진단을 가지고 처방을 한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해야 옳은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먼저 북한을 보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북의 핵보유 목적이 남한 적화통일이나 경제적 지원 확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핵이 공갈 협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 정권의 안전담보라는 사실은 북한의 일관된 주장과 핵개발을 시작한 후 이제까지의 행태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주민 15만 명 앞에서 핵을 떠난 평화를 연설할 기회를 주는 행위, 북미수교를 간절히 소망하는 행동, 식량 등 인도적지원에 대해 비본질적 문제라고 거절하는 행태는 바로 그 증표다. 둘째로, 미국의 행태를 보자. 말로는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 조건 없는 대화를 하자고 북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는 북이 미국의 제안을 절대 신뢰
폭풍이 물결을 일으켜 물의 투명함을 잃게 하듯이, 정욕과 불안, 동요, 공포는 마음을 어지럽혀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의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롭고 언제나 만족한다, 빈약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불만이요 언제나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외면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만 괴로워하거나 불안과 동요를 느낀다. 그럴 때, 그들은 불안한 듯 자문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하고, 자신들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을 늘 염려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직접 책임이 있는 일과 씨름하며, 자신의 생명은 자기 완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처럼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만일 그가 자신이 진리를 지켜낼 수 있을지, 허위를 벗어날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걱정하지 말라. 네 걱정의 씨앗은 바로 네 손안에 있다.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관찰하여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는
만성폐쇄성폐질환(Chronic Obstructive Pulmonary Disease, COPD)이란 만성 염증에 의한 기도와 폐 실질의 손상으로 인한 회복 불가능한 기류제한을 특징으로 하는 질병을 말한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서서히 숨이 차는 증상이 나타나면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의심해 볼 수 있다. 특히 만성폐쇄성폐질환은 빨리 걷거나 언덕이나 계단 등을 오를 때 숨이 차는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고, 기침, 객담, 호흡곤란 등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별표3 제3호 사목에서는 ‘장기간·고농도의 석탄·암석 분진, 카드뮴분진 등에 노출되어 발생한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조금 더 구체화하여 ‘석탄·암석 분진, 흄, 가스, 증기 등에 20년 이상 노출되거나, 노출된 기간이 20년 미만이더라도 지하공간이나 밀폐된 공간 등에서 작업을 수행하여 만성폐쇄성폐질환이 발생’하였다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고 있다. 직업적으로는 석탄·석회석 광업소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광산에서 채광 작업 등에 종사하던 직종, 벌크선에서 유연탄 등을 하역하는 항운노조 조합원, 각종 석재
“나는 남의 민족에게 식민지화되고 노예가 되었던 민족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부정을 부정」하는 전민족적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함께 1970년대 한국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리영희 선생의 저서 『우상과 이성』에 수록된 ‘다나까 망언(妄言)에 생각한다’(1978)에 나오는 핵심적인 구절이다. 일본은 우리의 역사와 언어, 심지어 우리의 민족적 자질과 경험을 그들보다 열등한 것으로 만들고 가르침으로써 우리 민족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해방 후에는 그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노예에서 주인이 된 자아를 긍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가 다나까 일본 수상의 “일본의 한국 통치 교육이 한국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망언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교육을 받은 정관계, 재계, 교육계 등의 인사들은 일본인들과의 회합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하며 친선을 도모한다. 부정을 부정하기는커녕 노예근성이 내재화된 모습이다. 한일협정 회담 당시 식민정책을 합리화했던 구보다 망언 이후 일본 관료들의 망언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사람들도 나쁘지만, 우리 내면의 자세도 살펴보자는 것이 선생의 뜻이었다. 같은 책에 수록된 ‘광복 32주년
역사란 무엇인가.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언명하였다. 그저 시간이 흘러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나 인물이 현재와 미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최근 독도 인근에서 일본과의 해상 훈련이 여론의 관심되면서 이 훈련이 ‘한반도에 욱일기 휘날릴 우려’라는 행태로 비판을 받자 한 정치인이 일본은 조선과 전쟁을 한 적이 없고 조선은 내부에서 썩어서 무너졌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식민사관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조선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내부적으로 붕괴된 것이며,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패망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조선이 내부적으로 무너지는 상황이라면 힘에 의한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정당화되는 것인가. 이 같은 식민사관적 발언에서 역사의식의 부재(不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잃은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핍박받고 피눈물을 흘렸는가. 상해로 하얼빈으로 또 만주벌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유랑 가요의 고전은 태평레코드사에서 1940년 10월 발매한 음반으로서 ‘산 팔자 물 팔자’와 뒤를 이은 ‘번지 없는 주막’이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40년의 대표곡이요 히트곡으로써 백년설이 불렀다. 이 가요는 해방이 되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까지 불러졌다. 내 기억의 저장고에 기록된 내용의 가사를 보자면, ‘산이라면 넘어주마 물이라면 건너 주마 / 인생의 가는 길이 산길이냐 물길이냐 / 그님도 짝사랑도 풀지 못할 내 운명 /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 대로 살아보자’ 이다. 나는 인천에 사는 매형의 회갑 때 이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산길인가 물길인가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도 그랬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번지 없는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다시 걸어야 했다. 그때 장만(張晩)의 시조를 만났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만 하리라.’ 바다의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험한 산길에서 다시 고생을 한 어느 한국인의 한숨 소리를 듣는 듯했다. 이어서 배·말 다 집어치우고 흙 속에서 호미로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OWS)’는 시민 시위가 있은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2011년 9월 ‘고학력 저임금’ 세대가 시작한 일종의 계층 투쟁이었던 OWS는 그 후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6년 10월 시작된 광화문 촛불 집회는 누적 참여 인원 1600만을 넘어서면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내었다. 세계 최초로 평화 시위에 의한 정권 ㅛ체의 무혈혁명이다. 군사정권의 맥을 이어온 새누리당은 적폐 정당으로서 와해 되었고, 19대 대선 패배를 통해 민주당 정권이 등장했다. 이런 흐름은 21대 총선까지 이어져 민주당의 역대급 국회 의석 확보로 나타나, 사회개혁을 위한 행정부 및 의회 권력을 확보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1%는 기득권을 이용해 배를 불리고, 코로나19는 양극화를 더욱 심화되었다. 심지어 촛불 시민은 지난 대선에서 쫓아냈던 적폐정당의 재집권마저 목격하게 된다. 적폐 정당에 기반한 검찰 독재정권의 출범이었다. 그동안 힘들게 전국에서 서울로 집결했던 촛불시민들의 열망과…
김정은 정권이 하루가 멀다하고 미친 X 널뛰듯 핵무력을 과시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맞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공포의 균형’으로 일컬어지는 핵무장론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타부로 여겨져 온 ‘핵사용 전략’을 구체화하고, 선제핵사용 독트린마저 폐기한 북한을 상대로 우리가 취할 궁극의 수단이기도 하다. 더욱이 국제적 핵질서의 조정자역할을 해왔던 NPT(핵확산금지조약) 거버넌스는 핵보유국, 특히 러시아가 비핵국을 상대로 핵위협을 노골화함으로써 균열조짐도 보이고 있다. 그간 우리는 NPT 체제를 최대한 존중하고 핵무기 개발보다 IAEA의 사찰 등을 적극 수용하면서 평화로운 핵이용에 앞장서왔다. 그러나 지난 8월 뉴욕에서 4주간의 토론에도 불구, 최종문서도 도출하지 못하고 끝난 NPT 10차 평가회의는 NPT 존속의 당위성에 의문을 더한다. 여기에다 1995년 25년간 한시적 존재키로 했던 NPT를 영구연장키로 한 ‘NPT 영구연장’은 비핵국과 핵보유국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영구연장 이전에는 핵보유국의 핵비확산 요구와 비핵국의 핵군축 요구가 대체로 균형을 이루었지만, 이후에는 핵비확산 의무가 더욱 강조되었다. 핵보유국은 더 이상 비핵국의 눈치를 보지 않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 줄 글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얻고 잃음의 반복이지만, 가을에 부디 아프지 말라고 시가 위로를 건넨다. 점점이 붉어지는 단풍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웃고 있을 사람을 생각한다. 수고로이 얻은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가을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 10월의 단풍을 아니 보고도 가을을 보냈다 할 수 없다. 쫓기는 원고에 매달려 풍경을 잃어버릴 즘 오랜만에 생각나는 지인에게 살뜰한 전화를 건네면 이미 좋은 곳을 찾아 휴일을 즐기고 있다. 아직 번듯한 명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말이라도 공손할 일이다. 감질 거리는 생각한 줄 쓰려고 무수한 날이 필요하겠지만 잊는 것도 순간이다. 떠나려고 단풍은 저리도 몸서리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여기까지 올 수 있다. 부디 아프지 마라. 아무도 모르게 떠나면 쉽게 잊힌다. 먹고살기 힘들어 고향을 떠난 때가 어제 같은데, 건강식만 골라먹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야지. 주위를 둘러보면 아픈 사람이 꽤 많다. 쌀이 없어서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오니 고질적인 위병이 사라졌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병으로…
세상 사람들이 수많은 진리의 높은 계시 중에서 지금은 이미 시대에 뒤처져버린 가장 낡은 것만 받아들여, 간명하고 솔직하고 자주적인 모든 사상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대부분을 기를 쓰며 반대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소로) 인류의 종교적 의식은 결코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더욱 순수해져 간다. 만약 누군가가 고정된 관념을 고집하면, 설사 그것이 옳은 관념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미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기둥에 비끄러매는 사람과 같다. 지금에 있어 진리라 하더라도, 더 높은 단계의 발전을 저해한다면 미망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유해한 미신의 하나는 세계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창조주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창조주의 신을 생각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필요도 없으며(중국인과 인도인들에게는 그런 관념이 없다), 또 창조주 또는 주재자로서의 신의 관념은 그리스도교의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 영혼으로서의 신, 사랑으로서의 신의 관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냉혹하며 고뇌와 악을 허용함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영혼으로서의 신은 고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