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그 밖에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모든 금품을 말한다(근로기준법 제2조 제5호). 근로의 대가로 받는 돈이다. “근로”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동조 제3호). 그렇다면 임금은 노동의 대가다. 노동(勞動)은 힘들여 일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돈을 받고 “힘들여 일함”을 판다. 사용자는 돈을 주고 “힘들여 일함”을 산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시간을 들여 일한다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을 내어주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임금과 교환한다. 인간의 삶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이다. 상품으로써의 노동은 산업화의 산물이다. 물론 농경사회에도 노동과 임금은 존재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이 정해진 가격(임금)과 규격(시간)에 따라 하나의 상품으로써 거래되는 노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이 상품이라는 주장은 사실이지만 불편하다. 인간의 삶이 조각조각 나뉘어 상품으로 거래된다는 것이 편할 수는 없다. 애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상품일 수 없음에도 상품이 되어버린 노동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다. 덤핑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저임금을 만들었다. 과도하게…
2050년엔 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중이 40%에 이르고 이 가운데 절반은 독거노인이 될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과 고령화, 비혼(非婚)이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청의 ‘장래가구추계(2020~2050년)’에 따르면 2050년 1인 가구는 905만4000가구로 전체(2284만9000가구)의 39.6%를 차지한다. 2020년 31.2%(648만가구)에 비해 대폭 늘어난다. 2050년까지 1, 2인 가구의 비중은 75.8%에 이른다. 또 30년간 가구수 추이를 연평균으로 보면 1인, 2인 가구가 각각 8만6000, 8만3000씩 늘어나는데 비해 3인~5인 가구는 크게 줄어든다. 한 가지 더 주목되는 대목은 2020년부터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데 이어 총가구수도 2039년이면 정점에 이를 것이라는 점이다. 가구수도 2040년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고령화와 가구수의 양적 질적 변화에 따른 정부의 주택 및 복지 정책 전환이다. 그동안 정부의 주택정책은 3, 4인 이상 가구원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73년 도입된 국민주택의 전용면적은 85㎡(25.7평)다. 우선 1, 2인 가구 증가에 맞는 주택공
애견 간식이 배달됐다. 가격은 종전과 같은데 크기가 줄었다. 점심시간, 1만 원 미만으론 제대로 된 한 끼 식사가 쉽지 않다. 휘발유 1리터 가격이 2100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고속도로엔 시속 80~90km의 ‘정속’ 주행 차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고(高)물가 시대, 일상의 한 모퉁이다. 한편, 주가 급락에 따라 증시엔 신용반대매매 리스크가 커졌다. 시중금리 상승으로 가계엔 이자 부담에 비상이 걸렸다. ‘빚투’에 나섰던 젊은이들의 곡소리가 심상치 않다. 전기요금도 인상될 예정이다.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위기)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부에선 ‘최저임금 동결’을 주창한다.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인지, 이기주의적 발로의 주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28일, 경제수장인 추경호 부총리는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임금을 올리기 시작하면 물가가 연쇄 상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과도한 임금 인상’은 사회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취지라고 한다. 십분 이해하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물가상승에 걸맞은 임금인상이 확보돼야 경제도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최저임금 인상’
가족 이기주의는 개인 이기주의보다 훨씬 더 맹렬하다. 자기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희생시키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가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곤경까지 이용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긴다. 인색, 뇌물, 노동자의 탄압, 부정한 상술,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가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제약할 수는 없고, 또 제약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태어난 날부터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데, 그 사람들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인간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가족애와 조국애가 배타적인 것이 되어 그것 때문에 인류의 보편적인 요구를 물리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양육자가 아니라 그 무덤이 되고 만다. (채닝) 가족에 대한 사랑은 결국 자기애의 감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고 나쁜 행위의 원인은 될 수 있어도 결코 그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 가족에 대한 사랑 속에는 자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의미의 선악이 들어
공동체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사회적 자본은 신의가 첫째로 꼽힐 터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 신의이다. 우리 사회는 나라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신의를 지키지 않을 경우 이는 곧잘 사회적 갈등과 불신을 키운다. 예부터 왕과 신하, 백성 상호 간, 스승과 제자, 부부 사이, 부자 관계, 친구 사이에서 가장 중시된 덕목은 가장 중요한 도덕적 기준이자 판단 근거이었다. 춘추전국시대 秦 나라의 실력자 公孫 앙(鞅)은 위 나라에서 사이좋게 지냈던 公子 앙(卬)을 전쟁터에서 상대국 장수로 맞는다. 하지만 공자 앙에게 과거 인연을 미끼로 서로 싸우지 말고 동시에 병력을 철수시키자며 거짓 화친을 제의한다. 그는 이에 속은 공자 앙을 불러내 붙잡아 죽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신의는 무너진다. 새로 등극한 왕이 ‘믿음이 안가는 인물’이라는 최종 판단을 내린 것이다. 위기를 직감한 그는 다시 위 나라로 피신했으나 하급 현령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대는 친구를 배신한 사람이니 내가 당신을 챙겨주어야 할 도의란 찾을 수 없다”고 내쫓은 것이다. 속임수로 권력에 오른 자의 배신행위가 낳은 인과응보이다. 권력자들은 주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 이후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재벌은 재벌대로 참여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한편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위축된 세계 경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가정경제는 식량과 에너지 가격을 비롯한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신음하고 있고, 선진국의 긴축 재정정책은 부채비율이 높은 국가와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이미 디폴트 상태에 있고 몇몇 국가는 디폴트 직전이다. 과연 한국 경제는 이로부터 자유로운가? IPEF 참여는 작금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상황을 악화시킬까? 우크라이나 전쟁이 초래한 또 다른 결과는 ‘지경학적 분열’ 현상이다. 세계는 러시아에 경제적 제재를 부과하는 진영과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를 유지 또는 강화하는 진영으로 양분화되고 있다. 설상가상 IPEF의 출범은 지경학적 분열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IPEF가 러시아 진영에 속해 있는 중국의 고립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지난 30년간 ‘통합’의 힘으로 생산성을 향상하고, 경제 규모를 3배로 늘렸으며, 십 수억 명의 극빈층을 구제하
1인 가구가 늘고 이웃 간의 단절현상이 심화되면서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키우는 국민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농식품부에서 발표한 ‘2020 동물보호 국민의식조사’에서는 국내 반려동물 양육가구가 638만 가구였다. 통계청의 ‘2020 인구주택총조사’ 313만 가구와는 큰 차이가 있지만 이제 집안에서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애완’이 아니라 ‘반려’로써 인간의 가족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게 되면 가족을 잃은 것처럼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반려동물이 죽으면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다. 폐기물관리법 제2조는 동물의 사체를 생활폐기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을 폐기물로 취급하는 법 때문에 반려동물의 사체를 자기 땅에 묻는 것도 불법이다. 동물의 사체를 땅에 묻는다면 경범죄 처벌법 제3조에 의해 1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 처벌을 받는다. 함부로 버리거나 화장하는 것도 안된다.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거나 불법 매립하는 행위와 같다. 따라서 의료폐기물 처리 방식이나 규격 쓰레기봉투를 통한 배출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물론 동물장묘 시설을 통
할머니가 앉았다. 시장 입구다. 기다란 우산에 비닐을 씌워 비를 피한다. 생김새만 보아서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천막 같다. 생김새만 닮았을 뿐, 저렇게 작은 천막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쪼그리고 앉은 라면 박스 위로 비가 들친다. 할머니 발치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에도 비는 어김없다. 상추랑 쑥갓은 이천 원이고 고추는 천오백 원이다. 파란 바구니가 상추랑 쑥갓이고 빨간 바구니는 고추다. 빨간 바구니는 파란 바구니보다 작다. 할머니의 굽은 어깨도 비닐을 씌운 우산보다 작다. 우산을 씌운 비닐을 타고 빗물이 줄줄 흐른다. 비닐 안쪽은 할머니의 입김으로 뿌옇다. 비 오는 날의 하루가 뿌옇다. 할머니 앞에 아주머니가 앉는다. 두부가게 아주머니다. 기다란 우산에 비닐을 씌워 비를 피하는 할머니에게 콩물을 건넨다. 콩물 담은 바가지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으짤라고. 오늘 같은 날은 나오지 말고 쉬어야제. 말은 억세도 눈빛은 살갑다. 아주머니는, 손사래 치는 할머니 비닐 천막 안으로 콩물 바가지를 밀어 넣고 돌아선다. 한참을 꿈쩍도 하지 않던 할머니가 콩물 바가지를 집어 든다. 한 모금이나 마셨을까. 할머니는 빈 페트병에 콩물을 부어 담는다. 페트병 두 개에 콩물이 가득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의 어딘가에서 허우적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우리는 거대한 질서 속에서 웅장한 생명의 협주곡을 함께 연주하는 중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분자는 이전에 누구의 몸 혹은 자연의 일부였고, 또 앞으로도 누군가의 몸 혹은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몸을 결코 소멸하지 않고, 지구상에 생명이 계속되는 한 끊임없이 다시 어딘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의 분자 단위만이 아니라, 내 몸을 꾸려가는 기본 원리도 살아 있는 세상의 모든 나머지와 함께 같은 원리로 돌아가며 함께 호흡한다. 우리는 진정 우주에 속한 존재이며, 이 귀속감을 깨닫는 일은 우리 삶에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고 그 깊이를 더해준다. (프리초프 카프라) 예수가 당면했던 사회 분위기와 부처가 출현하신 시대, 혹은 당면했던 사회 분위기는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형식에 치우친 종교적 관행이라든가, 지식층인 성직자 계급이 일반 백성들의 종교적 욕구를 악용하고 왜곡시키는 작태는 엇비슷했지요.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 모든 걸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오셨고, 광명과 해방의 길이 모든 인간에게 열
“‘기자’ 대신 ‘기레기’를 요구하는 자본”. 지난 6월 14일 KBS 아침 뉴스 한 꼭지의 제목이다. 이 보도에 따르면, KBS의 우리은행의 라임주가조작 관련 보도와 호반건설의 ‘2세 일감몰아주기’ 관련 보도에 대해 두 기업에서 해당 기자들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걸고 개인재산 채권가압류를 신청했다. 겁주기를 위한 전략적 봉쇄소송이라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이 나온다 해도 담당 기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재벌기업의 언론 장악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30년 전에 ‘김중배 선언’이 있었다. 1991년 동아일보는 두산에 의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을 집중보도했다. 대광고주 두산은 동아일보 사주를 통해 집요하게 보도 통제를 시도했고 이에 저항하던 김중배 편집국장은 결국 사퇴한다. 그 퇴임사가 바로 ‘김중배선언(1996.9.6.)’이다. “1990년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권력보다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도전의 세력에 맞서게 되었다는 게 신문기자 김중배의 진단입니다.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권력은 자본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1991년 가을 계간 『사상』에 “‘무관의 제왕’에서 ‘언론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