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13년(1789) 7월11일 고모부 박명원의 상소로 인해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그날 바로 영우원(사도세자 묘) 이전 담당할 관료와 이장할 장소까지 선정한다. 이장을 준비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0월 7일 수원으로 이장하는데 이는 상소가 올라온 지 3개월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장할 곳에는 읍치가 있어 미리 옮겨야 하는데 새로운 읍치는 현재 위치인 수원 팔달산 동쪽 기슭에 행궁과 객사을 짓고, 남쪽기슭에는 향교를 9월 26일 건립한다.
새 수원읍치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산성과 인접되는 곳이 됨으로 독산성 주변이 유력한데 팔달산 주변으로 정한 것은 과천현과 옛 수원읍치와의 거리가 멀어 중간에 쉬어갈 수 있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읍치건물들은 사도세자 묘의 이장할 때 정조가 머물 수 있도록 서둘러 2달 만에 완성하게 되는데, 지금처럼 운송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 안면도에서 나무 등을 운반해 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것은 정조가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의 묘에 이장에 대하여는 정조가 즉위하고 14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장을 결정하고 이를 시발점으로 온 힘을 다하여 짧은 시간에 마무리하게 되는데 그렇게 서둘러서 일을 마무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박명원의 상소가 있고 이장을 결정하던 날 정조는 대신들에게 “갑오년(영조50년, 1774)에 성묘를 하고부터 이장을 계획하였으나 지금의 자리보다 천만 배 나은 곳이 있어야 여한이 없을 것인데…” 하였다.
또 정조 10년(1786) 9월27일 영우원의 뒤편 물길을 다른 곳으로 내자는 홍문관의 이청(李晴)의 건의에 정조는 현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하며 특히 수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어도 제방을 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반대한다.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정조는 즉위하고부터 기유년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동안 마음에 드는 명당을 선정하기 위해 몰래 연구를 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기유년이 되고 그해의 반 이상이 지난 다음에 수원으로 갈 것을 마음먹고 고모부 박명원에게 상소를 부탁한 것이 되는데 왜 결정을 기유년의 반도 안 남은 시점까지 끌고 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정이 늦어진 이유로는 정조가 깜박 잊어버리고 시기를 놓쳐버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명당의 위치를 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나라에서 능이나 원으로 쓰기 위해 선점한 3곳 중 수원은 일찍이 길지로 선조와 효종의 능침 자리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수원에 새로 점지한 자리는 비록 제일 좋은 자리라고는 하지만 길이 멀고 산성을 헐어서 철거하고 민가들을 옮겨 내보내야 하니 폐단이 적지 않다” 하고 선조의 능을 건원릉 근처로 선정한다.
현종은 선왕 효종의 능 위치를 선정할 때, 윤선도는 ‘여주 홍제동이 제일이고 수원이 두 번째이며 건원릉이 그 다음이다. 하지만 홍제는 멀고 수원은 가깝고 풍수적으로도 수원은 대단한 곳이다’하면서 수원을 주장한다. 하지만 수원은 그동안 많은 관리들의 반대가 있었고 특히 송시열은 군사적 이유와 수백호의 민가를 이전하면서 굳이 최고의 홍제동을 두고 수원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반대한다. 결국 효종의 능도 수원으로 가지 못하고 건원릉 서쪽에 자리하다가 결국 여주 홍제동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두 번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임금 스스로 포기한 점도 있지만, 새로 즉위한 임금이 경륜이 많은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한 점도 더 크다고 본다. 하지만 정조는 즉위한지 오래되어 신하들의 반대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이사의 문제가 되었던 백성들의 불만이 없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하고 오히려 이사하는 것이 이득이 되도록 조치를 취하게 한다. 그리고 경기관찰사에 서유방, 수원부사에 조심태 등 덕이 있는 관료를 선정하여 백성들을 잘 보살피도록 특별지시를 내려는 등 배려를 하여 성공리에 일을 성사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