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춤추는 중
/허수경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나는 춤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
-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시인은 지난 해 10월 3일 54세를 일기로 독일에서 타계했다. 이국에서 쉬지 않고 모국어로 시를 발표했지만 그곳에서 느낀 시인의 외로움과 허무와 두려움이 이 시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시집 맨 마지막에 수록된 이 시에서 ‘어느 낯선 들판’과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 시인은 철저히 혼자 놀면서 혼자 춤추면서 고국의 흙냄새를 공기와 햇살을 그리워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땅, 이 풍경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고 살지만 이 땅, 이 풍경을 떠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수구초심(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은 아니어도 시인이 얼마나 이 땅과 이곳의 사람들을 그리워했는지 느껴져 가슴이 아리다./이기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