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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행복한 납골당

 

동생이 죽던 해, 고향 동네에는 납골당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음성의 납골당에 안치를 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굳이 동네 분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다. 죽음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어머니 세대의 어른들은 자식의 죽음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당신이 먼저 가야 그게 순리라 생각했다.


몇 해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동생의 곁에 안치했다. 그랬는데 어머니 나이 팔순에 이르자 오래 살아왔던 곳으로 남편과 자식을 고향으로 불러오고 싶어하셨다. 동생에게는 고향이었다.


마침 윤달이 든 올해, 나와 형제들은 어머니 뜻에 동의를 했다. 두 사람도 고향에 오고 싶어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납골당이 많이도 생겼다. 민간이 운영하는 납골당은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고 관리비도 5년치를 선불로 받는 다는 걸 알게 되었다. 씁쓸했지만 어쨌든 옮기기로 하고 고향 동네에 새로 생긴 납골당을 둘러보게 되었다. 새로 지은 납골당인데다가 화려하게 지어 놓았고 수목장이니 잔디장이니 해서 안치 방법이 다양해서 좋았지만 역시 마음에 드는 안치 방법은 매우 비쌌다.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모셔올 걸 염두에 두고 둘러보면서 마음에 들어하신 안치실이 있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금칠로 꾸며진 안치실이었다. 그 방에서도 위치에 따라 수백만 원씩 차이가 났다. 안치 위치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엄마, 돌아가시면 우리들 사는 쪽으로 모시려고 했지. 사찰에서 운영하는 납골당이 있는데 아버지랑 동생이랑 모두 그 곳으로 모시려고 가서 둘러보기도 했어.”


어머니는 왜 진즉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왜 그런지 그런 말을 꺼내면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말 같아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당신 살아 계실 때 남편과 자식은 고향에 모시고 싶어하셨다. 어쨌든 이장을 하기로 마음 먹고 마지막으로 마음 정한 곳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시립납골당도 둘러보게 되었다. 추모관이 어떠한가 보려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는 그만 마음에 들고 말았다. 민간 납골당에서는 눈높이 자리가 안치 비용이 가장 비쌌다. 맨 아랫단, 윗단과는 4배 이상 차이가 났는데. 시립납골당에서는 맨 아랫단이든 맨 윗단이든 똑같은 가격으로 안치할 수 있었다.


물론 운이 좋아 -죽은 사람에게 운이 무슨 소용이겠냐만- 눈높이 자리에 안치가 되어도 안치비용이 같았다. 다만 들어오는 순서대로 안치해야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민간 납골당은 죽음도 돈으로 계급과 자리를 구분 지었다. 나는 그 모양새가 부당하고 불편했다.


“그러게, 뭐든 발품 팔아서 둘러봐야 한다니까.”


어머니도 만족해하시며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마침 운좋게도 아버지와 동생은 눈높이의 빈 자리에 모실 수 있었다. 윤달이라 해서 납골함이 빠져 나간 빈자리였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아담하며 어떤 야로도 없는 납골당이라 좋았다. 조금 섭섭했더라도 어머니 역시 마음에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이장 덕에 모처럼 가족들이 다 모였다. 납골함을 옮기는 것도 이장을 한다고 하니 이장이겠지.

 

모처럼 가족들이 같이 움직여서 두 분을 고향으로 모셔왔다. 마무리 짓고 평양냉면 잘한다는 집에 가서 냉면을 먹는 것으로 이장의 하루를 마무지 지었다. 그들이 저 곳에서는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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