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냉장고 문짝에 그런 문구가 붙어 있다. ‘탁월해 질 때까지 끝없이 연습하세요.’ 이 문구를 가져다 붙인 사람은 지금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아들이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가을 무렵이었다. 학교 과제 표어로 여러 장을 만든 것인데 다른 표어들은 소리없이 사라졌고 이 표어만 살아남아 냉장고에 붙어 있다. 이 고리타분한 말이 우리 집 냉장고에 붙은 뒤로 변화가 생겼다. 아들의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도 막연하게 축구선수 되겠다고 해서 축구클럽에 다녔다. 일주일에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그랬는데 저 탁월한 격문이 우리 집 냉장고에 붙은 뒤로 아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일주일에 두 차례나 세 차례 가던 훈련을 매일 가는 걸로 바꾸었다. 나나 아내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그리하겠다 해서 그리 하라고 했다. 다른 학원을 일체 다니지 않는 데다가 몸 쓰는 일이라 오히려 아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동네 아이들과 뭘 하고 놀지, 맛있는 걸 뭘 먹을 지에만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딱히 정한 꿈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산과 들, 강으로 놀러 다녔고 주머니에 용돈이 생기면 만화방에 가는 정
요즘 새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집을 나설 때 무의식적으로 마스크를 챙긴다는 점이다. 마스크 없이 집을 나서면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외출한 것처럼 찜찜하고 불안했다. 우리는 이 습관에 더 강력하게 길들여지기 위해 자석고리를 철문에 붙여놓고 마스크를 걸어두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 깜빡할래야 깜빡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이런 삶이 몇 개월은 귀찮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 당연함 속에 불편함도 녹아 있었다. 마스크 쓰게 되면서 얼굴의 반이 가려져서 상대를 단숨에 알아보는 일은 둔해졌다.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50년 넘는 세월을 살면서 이런 시절은 한 번도 없었으니 지금의 시간들은 낯선 경험이 될 터였다. 지난 늦가을 잠깐 동안 대면 수업이 2주 정도 허용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학교 강의를 가야했고 강의실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수업해 줄 것을 권유받았다. 한번은 강의실이 있는 6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수강생이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음에도 서로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강의실에 들어가셔야 나는 강사고 그는 수강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두 주 대면 강의를 했는데 몇몇이 비대면이 수업이 더
올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문발작가협동조합 문화사업의 하나로 역사올레에 동참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강의를 하는 주요강사가 아니라 보조강사로 참여했다. 주 강사들은 자신들이 맡은 2번의 기행에만 참석하지만 보조강사는 총 12번 모두 참석할 수 있는 권한 아닌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다 보니 주강사들과 달리 나는 참가자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8번째쯤 역사올레가 진행되자 흘려들은 아이들 이름도 알게 되었고 참가한 사람들 나름의 성향도 파악이 되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역사에 대해 알고자하는 열의가 대단했다는 점이었다. 신청받을 때부터 경쟁률이 높았던 편이라고 했다. 주말 나들이하는 셈치고 무료인데다 점심을 주고 역사까지 알게 되니 일석 삼조의 행사라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선 크게 재미난 일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휴일이라면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일 텐데 늘어지는 마음을 추스려 아침 일찍 버스를 타러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새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양하다는 걸 알았다. 1주일에 두 차례씩 6주에 걸쳐 매주 나가야 했지만 주강사와 달리 보조강사는 강의를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 대신 여러 잡일들을 챙겨야 했다. 사진 찍을 때 쓸 플래카드 들고
하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데 바로 아랫집에 사는 아저씨를 보게 되었다. 얼굴을 자주 마주쳤던 터였고, 한동안은 아들이 뛰어다녀서 층간소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몇 차례 인사를 간 일도 있어서 가깝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알고 지내는 정도는 되었다. 그날도 인사를 하고 묵묵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가 내게 말을 붙였다. “혹시 대학 졸업했습니까?” 나는 졸업했다고 말했다. “그럼, 내가 학원을 하고 있는데 혹시 나와서 강의해 볼 생각 없어요?” 오? 말로만 들었던 스카우트?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내가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는지, 그리고 내가 뭘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일산에서 작게 학원을 하고 있는데, 하는 일 없으면 우리 학원에 나와 강의 해봐요. 보아하니 젊은 사람이 집에만 있는 거 같은데. 뭐든 해야지.” 얼굴이 붉어졌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그 분은 마음 내키면 연락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나는 그 분의 뒤를 따라 나가 출근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다른 분들 역시 그 분처럼 나를 백수로 생각했을 터였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난 백수다. 그 즈음의 나는 글을 생
팔순의 어머니는 지금 평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 애틋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혼자사니 말 나눌 상대가 없어서 이겠지만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보다 유독 내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어머니가 화를 내거나 혹여 누군가를 비난해도 그냥 듣기만 한다. 자식에게 하소연하는 게 아니라 그저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심정으로 늘어놓는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런 저런 일로 평택엘 가면 어머니와 둘이 소주 한 병을 놓고 앉아 옛날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주로 듣기만 한다. 무슨 말이라도 실컷 하시게 말을 끊지 않는다. 이미 여러 차례 하셨던 말이라도 추임새까지 넣어 드린다. 지난 백중 제사 때였다. 큰 제사도 아니고 요즘 그런 제사를 지내는 집안도 드무니 나 혼자 내려가 제사를 지내는 편인데 제사 끝내고 메모할 종이를 찾다가 우연히 수첩 한 권을 발견했다. 무심히 수첩을 넘기다 아버지 필체를 발견했다. 그건 아버지가 죽기 1년 전에 남긴 일기였다. 아버진 오랫동안 투석을 하며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를 도왔다.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 사다주고 숟가락이며 젓가락 같은 것을 식탁 위에 놓아주고……. 그런 와중에 언제 일기 같은 걸 썼나 싶었다. 좀 신기했던 건
장마가 한반도에 길게 머물렀다. 관측 이래 최장의 장마라는 말을 들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뒤숭숭한 판국에 수해까지 덮쳐 수재민들의 상처는 더 깊어졌을 터였다. 집중호우에 살림살이가 거덜 난 수재민들을 보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날은 러시아 최초의 여성 통치자이며 신성함이라는 뜻을 가진 태풍 ‘올가’가 올라와 내륙 전체를 물바다로 만든 날이었다. 신성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중부지방을 때린 ‘올가’는 많은 걸 휩쓸어 갔다. 1999년 여름의 일이었다. ‘올가’가 내륙을 향해 올라오던 그 시각 우리 형제들은 평택으로 모이고 있었다. 아버지 생신잔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일찌감치 출발해서 내려온 터라 부모님이 계시는 일터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 오산역 인근이 폭우로 물에 잠기면서 서울을 오가는 모든 차편과 기차편이 끊어졌다.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막내 동생은 오산역에서 발이 묶여 근방의 모텔에서 하루 묵어야 했다. 다른 동생들은 늦게 출발한 덕에 오산을 넘어오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결국 그 날 저녁은 우리 세 사람만 둘러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저녁을 먹었다. 부모님이 폐차장 직원들 밥을 해주었던 터라 그곳에서 숙식을 하셨는데 우리도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영어는 알파벳이 아니라 ‘room for rent’라는 관용어였다. ‘세 놓음’이라는 이 관용어는 기지촌에서는 흔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지촌에서 자랐는데 어느 집 대문에나 이 관용어가 붙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방이라도 있으면 세를 놓았다. 부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지낼 수 있는 미군들이나 지역의 위락시설 등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세를 얻었다. 세를 얻은 여성들 중 상당수는 미군들과 살림을 차렸거나 드물게는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 다섯 개를 세 주었는데, 우리 집은 빈방이 생기면 금방 사람이 들어왔다. 세가 잘 나간 편이었는데, 마당 한 가운데에 작은 정원이 있었고 믿지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구경하기 힘들었던 좌변기와 욕조가 있었던 덕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 가족은 볼일을 보려면 집의 가장 어두침침한 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화장실이 집의 구석자리에 있었던 때문이었다. 화장실로 가는 길이 어둠침침했고 골목을 밝히는 등이 없어서 어렸을 때는 밤이 무서워 아침까지 참았다가 볼일을 보곤 했다. 그런 집에 방마다 좌변기와 욕조를 놓아주었던 터라 미군들과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동생이 죽던 해, 고향 동네에는 납골당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음성의 납골당에 안치를 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굳이 동네 분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다. 죽음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어머니 세대의 어른들은 자식의 죽음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당신이 먼저 가야 그게 순리라 생각했다. 몇 해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동생의 곁에 안치했다. 그랬는데 어머니 나이 팔순에 이르자 오래 살아왔던 곳으로 남편과 자식을 고향으로 불러오고 싶어하셨다. 동생에게는 고향이었다. 마침 윤달이 든 올해, 나와 형제들은 어머니 뜻에 동의를 했다. 두 사람도 고향에 오고 싶어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납골당이 많이도 생겼다. 민간이 운영하는 납골당은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고 관리비도 5년치를 선불로 받는 다는 걸 알게 되었다. 씁쓸했지만 어쨌든 옮기기로 하고 고향 동네에 새로 생긴 납골당을 둘러보게 되었다. 새로 지은 납골당인데다가 화려하게 지어 놓았고 수목장이니 잔디장이니 해서 안치 방법이 다양해서 좋았지만 역시 마음에 드는 안치 방법은 매우 비쌌다.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모셔올 걸 염두에 두고 둘러보면서 마음에 들어하신 안치실이 있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