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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룸 포 렌트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영어는 알파벳이 아니라 ‘room for rent’라는 관용어였다. ‘세 놓음’이라는 이 관용어는 기지촌에서는 흔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지촌에서 자랐는데 어느 집 대문에나 이 관용어가 붙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방이라도 있으면 세를 놓았다. 부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지낼 수 있는 미군들이나 지역의 위락시설 등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세를 얻었다. 세를 얻은 여성들 중 상당수는 미군들과 살림을 차렸거나 드물게는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 다섯 개를 세 주었는데, 우리 집은 빈방이 생기면 금방 사람이 들어왔다. 세가 잘 나간 편이었는데, 마당 한 가운데에 작은 정원이 있었고 믿지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구경하기 힘들었던 좌변기와 욕조가 있었던 덕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 가족은 볼일을 보려면 집의 가장 어두침침한 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화장실이 집의 구석자리에 있었던 때문이었다.

 

화장실로 가는 길이 어둠침침했고 골목을 밝히는 등이 없어서 어렸을 때는 밤이 무서워 아침까지 참았다가 볼일을 보곤 했다. 그런 집에 방마다 좌변기와 욕조를 놓아주었던 터라 미군들과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우리 집엔 미군도 살았고 미군과 살림을 차린 여성들도 살았으며 미군들과 살림을 차렸거나 결혼한 여성들의 가족들도 살았다.

 

우리 집 마당엔 포도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포도가 열렸다. 여름날 저녁이면 어머니와 우리 집에 세들어 사는 여성들이 평상에 모여앉아 쟁반 위에 포도 쌓아놓고 막걸리며 소주를 마셔가며 수다를 떨던 풍경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어느 집 미군이 아이와 여자를 버리고 도망갔다거나 흑인과 백인이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거나 어느 미군이 한 여성과 성당에서 결혼을 했다거나 했던 이야기들. 그 무리 속엔 혼혈 아이들도 더러 있었는데 언젠가 미군이 돌아와 자신들을 미국으로 데려 갈 거라는 허망한 말들을 들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그날 기억들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 떠올랐다. 14년을 파주에 살았지만 나는 그때까지 파주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군사분계선이 멀지 않고 서울보다 개성이 더 가깝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살면서 용주골과 장파리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2020년 들어서서 ‘리비교 아카이빙’ 사업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사업은 무산됐지만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이루어질 무렵 리비교 다리가 건설되었고 다리 남쪽에 기지촌에 형성되었으며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장파리 일대가 기지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지촌이 그러하듯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클럽이 있었고, 그 클럽에는 한국의 유명 가수들이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동안 부유한 동네였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장파리에는 미군들이 철수를 하면서 흔적만 남아 있는 반면 캠프험프리이자 K-6이자 나의 제2의 고향이었던 안정리엔 미8군에 내려오기로 결정되면서 다시 ‘room for rent’라는 관용어가 집집마다 부동산중개소마다 나붙기 시작했다. 이모님이 오랫동안 미군물건 장사를 하며 살았고 어머니가 아직 그곳에서 살고 있는 터라 간혹 내려가 보면 동네가 변하는 걸 실감하게 된다. 토지보상이 끝나면서 미군들이 살 집을 짓고, 그들과 관계된 종사원들이 내려와 거주할 공간을 만들고, 없던 돈을 들여 가게를 새 단장하고, 길을 포장하고…. 그들은 잠깐 세를 살다 갈 뿐인데, 언젠가는 ‘room for rent’ 라는 관용어도 사라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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