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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고향 가는 길

 

내 고향은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떠내려가는 돌다리 건너, 읍내에서 꼬불꼬불한 논길을 5리 걸어가야 하는 억불산 자락이다. 어릴 적 읍내에 살았던 나는 항상 고향 가는 것이 즐겁고 기대되었다. 대여섯 살 어린이에게 5리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었지만 나는 흔쾌히 길을 나섰다. 명분은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첫 번째는 큰집에 가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던 쑥떡 한 덩이와 조청이었다.

 

큰집에는 쑥떡이 살강에 놓여 있었다. 쑥이 쌀보다 많이 들어간 쑥떡은 거칠어서 씹다보면 껌처럼 되었다. 나는 조청의 달콤한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어떤 때는 독 속에서 홍시를 하나 내주실 때도 있었다. 그 큰 홍시를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결코 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큰집 즉 고향에 가면 맛볼 수 있는 맛이었다. 두 번째는 큰어머니가 챙겨주시는 소소한 용돈이었다.

 

“오메 내 새끼 왔는가?”

큰어머니는 몸빼 바지 안에 항상 준비해 두었던 용돈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때마다 내 머리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고 뿌리쳐야 한다고 배웠건만, 그 용돈을 단 한 번도 뿌리치지 못했다. 나는 그 용돈이 너무나 절실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다. 나는 고향에 자주 가고 싶었지만 차마 눈치가 보여서 자주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 년에 여러 차례 나는 고향으로 가는 논두렁을 걷고 있었다.

 

나는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 다만 항상 논에서 농약을 치고 있던 녹색 새마을 모자를 쓴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읍내에서 고향까지 가는 5리길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기억은 가을에 키가 나만큼 커버린 볏단을 헤치고 하염없이 논길을 걸어가던 기억과 추수가 끝난 빈 논에 무수하게 내려와 있던 황새들이 무리지어 ‘후드득’ 날아오르던 풍경이다.

 

큰아버지는 늘 그 논에 계셨다. 뜨거운 여름에도 텅 빈 가을 논에도 항상 녹색 새마을 모자에 지게를 지고 계셨다. 그리고 큰아버지는 또 언제나 술에 취해 계셨다. 내가 인사를 하면 예의 인상 좋은 얼굴로 웃으시며 손을 흔드실 뿐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큰아버지는 서울의 큰 대학을 졸업하셨다고 했는데 왜 농사를 짓고 계시나?’

그 누구도 나의 이런 의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우연한 곳에서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안기부에 잡혀가 조사를 받는데 안기부 조사관이 말했다.

 

“야, 고형권이, 너 육사 합격해서 육군 장교 되려고 했더라. 야, 인마. 너 신체검사 합격했어도 어차피 불합격이었어. 너 고00 이라고 알어?”

“네, 고00씨는 우리 큰아버지인데요?”

“자식아, 느그 큰아부지 빨갱이야. 인공 때 부역했어. 너 신원조회에 걸려서 안 돼.”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큰아버지의 녹색 새마을 모자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안기부가 덜컥 겁났다. 저들은 대체 나도 모르는 나의 사생활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세상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보안사, 안기부, 경찰 대공 분실이 가졌던 무소불위의 불법권력이 무너졌다. 그런데 그 권력을 이제는 검찰이 행사하고 있다. 검찰이 사법부 판사들까지 사찰하고 있다. 갈 길이 멀다. 검찰개혁은 아직 멀었다.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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