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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목숨을 건다는 것

 

나는 경기도 파주에 산다.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가 이런저런 플래카드를 보게 된다. 거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결사반대” 다. 무슨 화장터, 무슨 특수학교, 무슨 공장 뒤에는 어김없이 “결사” 반대란다. 뭐 반대하는 것이야 민주사회에서 정당한 의사표시니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조금 유감인 점은 “결사”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말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의 무게를 아는 것일까? 진정으로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90년대 초반, 나는 ‘행남사’라는 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다가 해고되었다. 93년 봄, 전국의 해고자들이 모여 ‘전해투’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전국을 돌며 복직투쟁을 할 때의 일이다. 노동청 점거농성을 했는데 청장이 면담에 응하지 않자 노동청 창문 난간에 매달려 투신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3층인가? 4층인가? 막상 유리 창문을 열고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떨어지면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겁이 덜컥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동지들은 벌써 난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비겁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어렵게 했다. 난간에 발을 걸쳤다. 하늘이 파랬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또 90년대 어느 뜨거웠던 5월로 기억한다. 여러 명의 학생들이 분신을 했고 광주학살의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이 한창일 때였다. 나는 노동자들의 한 부문 대표로서 거의 매일 가두투쟁에 나섰다. 양손에 화염병을 들었고 쇠파이프를 질질 끌고 나서기도 했다. 매번 가두에 나설 때마다 두려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최루탄 가스는 아무리 마셔도 면역되지 않았다. 대열의 맨 앞에 나서 멀리 전경들이 보일 때마다 이를 꽉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죽어도 좋다’는 결의를 했다.

 

‘죽어도 좋다’는 “결사”는 결코 면역되지 않았다. “결사”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고, 이제는 그렇게 되었다고 자부하고 살았다. 그런데 최근 상황을 보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아닌 다른 결사의 인물들을 보고 있다. 어디에선가 추미애 장관이 허벅지를 스카프로 질끈 동여매고 질의에 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추장관도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구나!’ 최근에 추장관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표현한 것을 봤다. 추장관만 그러한가? 이미 조국 전 장관이 “결사”의 각오로 나섰다가 인질로 잡힌 정경심 교수는 죄 같지도 않은 것으로 무려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누군가 ‘죽어도 좋다’는 결의로 검찰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이제 누군가는 추미애 장관과 조국 전 장관을 엄호하고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사수대로 나서서 지휘부를 지켜야 한다. 지금 검찰개혁은 우리에게 결사의 각오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그렇게 응대하자. 당신은 목숨 걸고 지킬 사랑이 있는가? 이 겨울 당신은 한번 목숨을 걸어보시라.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검찰개혁’이어도 기꺼이 그러고 싶다. ‘검찰개혁’이야말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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