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김동민의 아르케]1991년 5월과 2021년 5월

 

올해는 1991년 5월 투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 역사를 기억하고, 또 그 의미를 올바로 의식하고 있을까? 대체로 4050 세대는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의식하고 있을까? 1987년 6월 항쟁과 대비해 성과 없이 패배한 투쟁으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마도 아픈 기억으로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4050세대는 당시 투쟁의 현장에 있었다. 40대는 대학생이었다. 1991년 4월 26일 시위 현장에서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으로 불리던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사망한 이후 시민사회는 ‘노태우정권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여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를 구성해 투쟁에 나섰다.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서 쟁취한 직선제 개헌에 따라 출범한 정부를 부정하면서 민주정부 수립을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불과 4년 전에 민주화운동의 결실로서 들어선 정부(정치체제)가 부정되면서 타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미 6월 항쟁의 성과는 한계가 드러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 내지는 ‘개헌과 6공 체제의 청산’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됐던 셈이다.

 

그러나 5월 투쟁이 성과 없이 끝남으로써 패배감에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날조된 유서대필 사건과 정원식 총리 사건으로 도덕적 타격을 받은 탓에 투쟁 주체들은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이다. 그 결과 6월 항쟁만 부각되고 기억하는 사회 분위기가 굳어졌다. 해마다 6월 항쟁은 성대하게 기억하고 추모하는 가운데 5월 투쟁은 가려져 있었다.

 

6월 항쟁과 5월 투쟁은 불과 4년의 갭이지만, 세대로는 1980년대와 1990년대라는 10년의 터울이 있다. 50대의 86세대와 40대인 97세대 사이에 세대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사이 전교조의 등장도 주목할 만하다. 97세대는 전교조 세대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이 고등학생일 때 전교조 활동이 시작되었고, 1991년 5월 18일 강경대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을 향하고 있을 때 참교육 실현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한 김철수는 고등학생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5월 투쟁이 대중의 기억에서 소환되지 못하는 사이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의 과제는 잊혀진 상태에서 86세대가 그동안 1987년 체제의 혜택을 누려왔다고 볼 수 있다.

 

5월 투쟁은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선구적 운동이었다. 무릇 혁명이나 운동이 한판 승부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금치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동학농민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했기에 그 후로도 더욱 절실하게 저항했고, 그 정신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어 온 것이다. 50세 박용진 의원의 대통령 출마 선언은 상징적이다. 50대에 접어든 97세대의 부상은 5월 투쟁이 제기한 ‘민주정부의 수립’이라는 과제의 부활을 동반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