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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비겁한 인생

 

내 인생 초반부는 참으로 비겁했다. 나 혼자만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남의 등을 밟고 올라서려고 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존재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실이니 정의니 하는 것은 관심도 없었다. 불의를 보고도 내가 당하는 일이 아니면 피해갔다. 비겁한 인생이었다.

 

1980년 5월 어느 날 처음으로 광주시민군을 목포에서 만났다. 갑자기 상가의 셔터 문들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골목으로 피했다. 무슨 총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큰 태극기를 휘날리며 택시 두 대가 앞장서고 광주 현대운수 시내버스 두 대가 목포 중앙도로를 지나갔다. 시민군은 버스 유리창에 칼빈 총을 들고 앉아 있었다. 나는 급히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시민군이 뭐라고 외쳤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라는 외침은 또렷하게 들렸다.

 

다들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어떤 노인은 거리에 나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박수는 함성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데모 대열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을 처단하자!” 그러나 나는 여전히 비겁했다. ‘광주에서 간첩들에게 현혹된 폭도들의 난동이 있었다.’는 신문 기사를 더 믿었다. 나는 데모에 나서는 친구들을 막아서기까지 했다. 공수부대가 목포에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자 나는 잽싸게 섬으로 도망을 갔다.

 

지난 주말에 나는 518 묘지를 찾았다. 거기에는 내 인생을 바꾼 두 분이 계셨다. 윤상원 열사와 리영희 선생님이다. 나는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광주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광주의 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나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때 내 자신에 대한 혐오와 자책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민중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진실에 도달한다. 그러나 나 같은 싸구려 먹물들은 머리로 설득되어야 가슴이 따라가는 비겁한 인생이다.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은 “우상과 이성”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내 사상의 아버지였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비로소 다시 찾은 518 묘역 윤상원 열사의 무덤에서 통곡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비겁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1980년 5월 그 마지막 날 광주 도청을 지킨 최후의 15인에는 고등학생도 있었고 공장 노동자도 있었다. 내가 주목하는 한 분은 윤상원 열사다. 그는 시민군 대변인이었다. 지식인은 그 계급적 속성상 민중의 편에 서기 어렵다. 그렇지만 윤상원 열사와 리영희 선생님은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민중과 같이한 민중의 대변인이다.

 

나는 조국 교수 편이다. 편 가르기라고 해도 좋다. 지식인이 그것도 강남좌파가 민중의 편에 선 것 하나 만으로도 조국 교수를 응원한다. 지금 조국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검찰로 대변되는 강고한 기득권 세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의심한다. 내가 1980년 5월에 그랬듯이 기득권 언론과 그들의 정치적 야바위꾼들에게 더 솔깃해져 있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하나다. 누가 민중의 편인가? 조국을 의심하는 분들이여, 광주로 가보시라. 부모자식을 잃은 원혼들의 절규가 들릴 것이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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