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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38 - 백령도 기독교 전래 이야기(2)

 서해 최북단섬 백령도. 지도상으로 보아 북한의 턱 밑에 있어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론 박진감과 생동감 그리고 안정감이 공존하는 섬이다.

 

섬 안에 있으면 ‘여기가 섬인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이젠 과거의 적막한 섬이 아니다. 200년 전 과거에도 그랬다. 교통이 불편해 한적한 섬이었지만 외국문물 전래 1번지라고 불릴 만큼 생동감과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된 여유 있고 멋스런 곳이었다.

 

바로 기독교 전래에 관한 이야기이며, 지난 호에 이어 소개한다. 양천 허씨가 백령도와 인연을 맺게 된 배경과 백령도 토호로서 역할과 1816년 외국 세력에 의해 첫 문호가 열리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사연도 소개했다. 이번 호는 중화동 교회의 탄생과 두 번째로 백령도에 복음을 전한 외국인을 소개한다.

▶ 체크포인트 1. 허득(許得) 공, 개화파 김성진을 만나 틔운 신앙의 싹, 중화동 교회로 열매를 맺다.

 

허득(1827~1913)은 갑신정변(1884) 이전에 황해도에서 서울을 오가며 개화파 인사와 교유(交遊)했는데,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자 신변이 위태로워 백령도로 낙향했다.

 

그리고 10년 뒤 충남 출신의 진사(進士) 김성진(金聲振)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개화파 정부를 세우려다 실패하고 백령도로 유배돼 왔다. 예전에 서울에서 개화파로 함께 어울렸던 허득과 김성진은 뜻 밖에 백령도에서 다시 만났고, 같은 처지의 동지로서 친하게 됐다. 허득은 서울에서 진사로 활동하던 지식인이었으므로 김성진을 훈장으로 모시고 중화동에 서당을 차렸다.

 

김성진은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그가 우연히 성경을 갖고 백령도로 유배간 것은 당시 기독교인이었던 사위가 짐 속에 한 권의 성경책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위가 유배가는 장인의 짐보따리에 넣어준 성경책이 백령도에 복음을 전해 많은 교회가 탄생하게 된 셈이다.

 

언더우드가 증언한 교회 건립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만일 그들이(허득과 김성진) 진리를 알기 원하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소래마을에 가서 그곳 교회의 서경조(徐景祚) 장로에게 더 물어보라”고 말했으며, 서경조 장로는 2년 만에 백령도를 방문하게 됐다.

 

“때마침 1899년 백령도 일대는 마을 공동체 행사인 고사가 만연해 있었으며, 서 장로 일행은 우상 숭배 등 제사의식을 타파하기 위해 막걸리와 술을 바다에 쏟았고, 신에게 바칠 제물을 팔아 곡식을 샀으며, 모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참신을 예배하기 위한 예배당을 건축하도록 첫 기금을 주었다”고 하여 민간 무속신앙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교회 건립이 목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허간 목사의 증언을 보면 “1898년 허득과 김성진 두 사람이 장연 송천(소래)교회에 김달삼이란 사람을 보내어 성경과 전도지를 구해 오니 백령도 전도가 본격화됐다. 1897년 8월에 서당에서 정식으로 창립 예배를 드렸으며, 소래교회 서경조 장로가 당일 예배를 인도했다.

 

다음 주부터는 평신도인 두 분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으며, 중화동에 터를 확보하고 초가집 예배당을 지은 것이 백령도 중화동 교회의 공식 출발이라고 한다”고 돼있다.

▶ 체크포인트 2. 서양인들의 백령도 및 그 일대에 대한 선교 노력들

 

1816년 백령도에 첫 번째로 외국(영국) 함대가 다녀간 16년 뒤인 또 다른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군함인 암허스트호(Lord Amherst)가 서해안을 찾았다. 여기에 칼 구츨라프(K.F.A Gutzlaff)가 타고 있었다. 그는 1803년 독일 출생으로 어학에 소질이 있어 6개 국어를 습득했다고 하며, 한국에 왔을 때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설이 있다.

 

그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다시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에 왔으며 중국에서 제2차 한국 선교를 위한 해안선 답사 당시 영국 런던 선교회 파송 선교사의 신분으로 1832년 7월 17일 백령도 부근까지 왔다.

 

19세기 당시 조선사회는 전국적으로 사회적 동요와 민란의 발생이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홍수와 전염병 창궐, 서양 세력 즉 이양선의 출몰 등 국내·외적으로 매우 복잡한 사회상을 보였던 시기이며, 특히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관군은 서양 세력을 보면 퇴치해 승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구츨라프 일행도 섬을 망보던 군인들 즉 요망군(瞭望軍)과 진군(津軍 혹은 관군)의 무력 다툼을 피하며 선교를 행하는 밀당이 과제였던 것이다.

 

7월 18일 오전, 장산곶 일대에서 선교 활동 및 통상 수교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정오 쯤 철수해 남쪽으로 항해하던 중 해상의 짙은 해무(海霧)에 갇혀 피항(避港) 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때마침 간간이 보였던 광경이 두무진 선대암 일대였던 것이다. 이후 변화무쌍한 기상으로 악전고투 끝에 18일 오후 암허스트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착한 곳이 중화동 포구였다.

 

중화동 주민들은 예고 없이 기상 악화로 불시착한 구츨라프 일행을 배격하기보다 친절한 도움을 주며 맞이했고, 구츨라프 선교사는 성경과 전도지를 나눠주며 선교활동을 했던 것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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