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5 (월)

  • 흐림동두천 12.5℃
  • 구름많음강릉 9.2℃
  • 흐림서울 13.0℃
  • 흐림대전 12.7℃
  • 흐림대구 11.2℃
  • 흐림울산 11.2℃
  • 광주 14.2℃
  • 흐림부산 14.3℃
  • 흐림고창 13.9℃
  • 제주 16.2℃
  • 흐림강화 13.3℃
  • 흐림보은 11.9℃
  • 흐림금산 12.2℃
  • 흐림강진군 13.7℃
  • 흐림경주시 7.9℃
  • 흐림거제 14.3℃
기상청 제공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⑰ 독립운동가 3인을 통해 본 경기도의 항일항쟁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안양의 원태우 지사
파주 공릉장 시위를 이끌고 임정에 투신한 심상각
일가친척 등과 광주 분당장 3·1운동을 기획한 한백봉

 

3·1독립만세운동 때는 전국 어느 지역보다 치열한 만세 시위가 이어졌고, 이후 일제가 문화통치로 노선을 바꿨을 땐 애국 계몽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경기도. 따라서 경기도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는 구한말 항일의병에서부터 3·1운동의 주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해방을 맞아야 했던 이들까지 다양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안양의 원태우 지사

 

 

이토 대사는 22일 하야시 공사 등과 더불어 수원부에 사냥을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부철도의 열차를 타고 오후 6시 안양정거장을 발차하자마자 이내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진 자가 있어, 돌이 유리창을 깨고 후작(侯爵, 이토)의 얼굴을 덮쳤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협약(協約, 을사늑약)에 불평하는 폭한(暴漢)의 소행일 거라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일본 박문사가 발행한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 발행)에 적힌 내용으로, 을사늑약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특파대사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수원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의 일을 보도한 것이다.

 

당시 이들은 오전 9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수원에 온 뒤 팔달산을 유람하고 사냥을 한 후 귀경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안양역을 지나 서리재 고개를 느릿느릿 넘고 있을 때 누군가 돌을 던졌다. 이 돌멩이에 열차의 유리창이 깨졌고, 그 파편에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에 상처를 입는 봉변을 당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일로전쟁 사진화보’는 ‘민소(憫笑, 가볍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의 삽화와 함께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우매한 농민으로, 대사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또 대한매일신보는 ‘어디서 돌멩이가 날아 왔냐면’이라는 제목의 기사(1905년 11월 24일자)를 통해 “안양역 근처에 잠시 정차하였더니 돌연 돌멩이가 들어와 차창은 파손되고 이토의 몸과 얼굴을 스치고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 7시에 서울로 돌아왔다”고 전했다.

 

‘을사늑약’으로 비통했던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바로 원태우 지사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안양역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친한 동료들과 함께 철로에 돌을 쌓아 열차의 탈선을 유도, 전복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거사 직전 결과가 두려운 동료 한 명이 돌을 치웠고, 원태우 지사가 근처에 있던 주먹만 한 돌멩이를 이토에게 던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이 사건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권24 ‘이토대사 탑승 열차 위해범 원태근 조치 건’이라는 문서(이 선고서에서는 원태우 지사를 원태근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2개월의 형을 살고 태형 100대를 맞았다. 또한 이때의 혹독한 고문으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았으며, 후사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일제는 원 지사의 의거를 축소하고 ‘취한의 악희’로 폄훼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원 지사를 가벼운 죄로 처리할 것을 지시해 세간의 관심을 이끌었다. 이에 대해 중추원 의장을 지낸 김윤식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한민족을 능멸하고 겉으로는 국민을 보호한다 하면서 하등으로 보아 종이나 짐승 취급을 하였으며 스스로 자초한 화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등박문이 자기 나라로 귀국할 때 일본인은 한인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겉으로는 체면치레고 말 같지 않은 소리라. 통분하고 울분을 금치 못한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은 원태우 지사의 의거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비교하면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이고, 태근(원태우)은 이토를 죽이지 못했다. 이토가 중근의 탄환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꼬투리는 태근의 돌멩이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파주 공릉장 시위를 이끌고 임정에 투신한 심상각

 

1919년 3월 28일, 파주 조리읍 봉일천리 공릉장에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 가운데 2000여 명은 발랑리 광탄면 사무소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공릉장까지 행진한 주민들이고, 나머지는 이 과정에서 합류한 인근 주민들이었다.

 

이날 공릉장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심상각이었다. 이들은 봉일천에 있던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이 높아진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10명이 죽고 70여 명이 다쳤다. 역사는 이날 공릉장 시위를 경기 북부에서 가장 치열했던 독립만세운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심상각은 중국 상해로 망명길에 올라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요원으로 활동한다. 또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는데, ‘동제사’는 상해와 남경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항일 독립운동단체였다. 10년 만에 귀국한 그는 신간회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인 파주로 돌아와 광탄보통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으로 취임, 교육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안재홍·이상재·백관수·신채호·신석우·유억겸·권동진 등 34명이 발기했다.

 

 

한편, 심상각과 함께 공릉장 시위를 계획했던 이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서울 경성대동법률학교를 나온 류영은 졸업 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일하다 일제의 침략정책을 감지하고 곧 사직했으며, 3·1만세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와 시위를 계획했다. 또한 이로 인해 징역 1년형을 받았다.

 

김웅권의 경우 공릉장 시위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연통제 조사원을 지냈다. 상해에서 후장대학을 졸업했고, 광복 후에는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민족청년단 발족(1946년)에 참여해 총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백봉, 광주 분당장 3·1운동을 기획하다

 

 

광주군 돌마면에서도 3·1독립만세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이 운동을 이끈 주역이 한백봉이다.

 

그는 일가친천과 지역 유지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한편 인근 낙생면장인 남태희에게도 만세운동 참여를 제안했다. 옛 광주시 낙생면은 지금의 판교 지역에 해당한다. 이들이 정한 거사일은 분당장날인 27일. 

 

거사를 하루 앞둔 26일 밤, 그는 돌마면 율리 주민 50여 명과 함께 뒷산에 올랐고, 새벽까지 봉화를 밝히며 횃불을 들고 다음날 있을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을 예고했다. 

 

 

이날 시위를 보고한 ‘일본외무성 육해군문서’에 따르면 당시 분당리 장날 모인 주민들은 3000여 명에 달했다. 또한 책 ‘3·1운동 비사’에는 이 시위의 규모와 양상에 대해 ‘만세 시위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일본인 헌병도 함께 만세를 부를 정도로 격렬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 인해 한백봉은 연행돼 4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1년의 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人道)에 근거해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일본인 판사는 이를 일축했다. 

 

분당리 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실형을 받은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힌 순간에도 태극기를 품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옥고를 치르고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백봉은 농민운동과 문맹퇴치운동 등을 이어가다 1927년 분당리 장날 만세 시위를 함께 이끌었던 한순회와 힘을 모아 신간회 광주지회를 구성했고, 간사를 맡게 됐다. 

 

 

그는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될 때까지 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사회의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운동,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광주 지역 유림을 이끌면서, 충렬서원과 광주 향교를 중심으로 유림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우리 정부는 1990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 지난 2007년 성남문화원과 성남 3·1운동기념사업회는 ‘송헌 한백봉 선생 묘비 제막식’을 열기도 했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