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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시가연(詩歌演)'

 

 

시절 참 수상하다. 국내외 험한 정세는 끝내 죄없는 민초들을 희생시키고 미봉될 것이다. 나는 지금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이 나라와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저 악몽이었으면 좋겠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어째야 하나. 이렇게 걱정이 태산일 때, 나는 종종 안전하고 편안한 은신처를 찾아 찐하게 의존한다. 오늘은 그곳에 관한 이야기다.

 

거기서 벗들과 측은지심으로 동병상련한다. 한 친구가 불안한 미래를 높은 통찰력으로 예언하면 착하게 받아들인다. 이 진지한 실용주의의 시간은 한 사내가 두부김치에 막걸리 서너 병을 시키면서 이내 막을 내린다. 침울의 그늘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활기를 띤다. 술은 다정하고 똑똑한 친구들 보다 늘 곱절로 유력하고 우호적인 물질인 것이다. 오죽하면 서양의 멋쟁이들이 술을 '스피릿'이라 했겠는가. 번역하면 '술은 올바른 정신(spirit)을 일깨워주는 실로 큰 친구, 대붕(大朋)'쯤일 거다.

 

실은, 이 정도는 세상의 모든 술집에서 가능한 체험이다. 인사동 주점에서 그 기본 미덕에 더하여 매번 특별한 감동과 기쁨을 주는 까페가 하나 있다. 후배들이 '서정춘이라는 시인'이라는 시집을 헌정한 그 시인이 홍보부장이다. 문화공간 '시/가/연(詩歌演)'. 거기에는 항상 시와 노래, 공연이 있다. 우정과 환대가 있다.

 

 

시인 김영희와 건축가로 소리시인(시낭송가) 이춘우는 짝꿍이다. 이 집 주인이다. 40명쯤 앉을 수 있는 공간에 무대와 피아노까지 다 갖춰 놓았다. 손님 중 누구든 나머지를 관객으로 하여 시낭송, 연주, 노래를 할 수 있다. 나도 취하여 이 무대에 올라 이백의 '장진주'(將進酒)를 암송하고 '남도의 비'를 불렀다. 소설 '옥봉'의 저자인 장정희 선생과 함께 한 곳도 여기였다.

 

우리말 지킴이 故 외솔 최현배 선생의 장남은 최영해 정음사 대표고 그 아들이 최동식 고려대 화공과  교수다. 시/가/연은 최영해/최동식 부자의 제사를 모셔 왔다. 정음사는 윤동주 시집 초판본을 낸 출판사로 유명하다. 故 이창년 시인의 제사도 지낸다. 각박한 인생살이의 어느 지점에서 만난 타인들에게 이렇게 뭉클하게 예를 다하는 건 이 부부의 품격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생진, 임보 등 걸출한 시인들과 박찬일, 서봉석 시인 등이 시가연에서 시창작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각각 운영한다. 또 우리가곡 부르기는 손종렬 단장, 영화모임은 최명우 교수, 판소리 모임은 이규호 교수가 이끌고 있다. 임진택, 김명곤 등도 이 무대에 섰다. 

 

지난 주 안주인의 초대를 받고 갔다. 국내 현역 최고령(97세) 성악가 테너 홍운표 선생과 17세 바리톤 박원일군의 80년 세월을 무색하게 만든 공연이었다. 놀라웠다. 바리톤 원영재(80세), 바리톤 양태갑 선생과 이경혜 교수(75세) 등이 함께 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문화감성이 폭죽이 된 거였다.

 

그 무렵 또 다른 날, 동국대 불교학과 박경준 교수, 울산대 건축과 김선범 교수, 관동대 환경학과 김영덕 교수와 함께 했다. 모두 70대 초반의 명예교수들인데 50대 청춘의 안색에 연주와 노래는 프로에 가까웠다. 한참 아래인 나는 그 틈에 끼어 모처럼 유쾌했다. 전공도 다른 그들은 시가연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다. 전설의 운동가요 '직녀에게'는 박교수의 동생 박문옥이 작곡한 걸 그날 알았다. 이별이 너무 길다. 그래서 슬픔도 너무 길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야 한다.

 

시가연은 이처럼 날짜와 요일을 달리하여 열 개의 학교로 가동된다. 손님은 자동으로 관객이 되고 수줍음만 떨쳐내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주객 구분 없이 함께 즐긴다. 이곳 벽면에는 수천 권의 시집이 꽂혀 있다. 이들의 가슴은 따숩고 넓다. 머리는 옳다. 이 멋으로 코로나도 이겼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생진 시인(94세)은 '섬의 시인'답게 특구 인사동을 '인사島'로 개칭한다. 대한민국을 서울로 줄이면 인사동은 제주도격이라는 것. 시가연은 '인사도'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가/연! 실로 희귀하고 소중한 문화예술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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