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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만주의 거부 최진동의 최후

 

 

돈을 많이 버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잘 쓰는 일이다. 큰 자산을 모은 사람은 많아도 잘 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냥 잘 쓰는 것을 넘어 의를 위해 잘 쓰는 일은 더욱 어렵다. 자신이 가진 재산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을 불러들이는 일에 나서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하고 의를 위해 가진 것과 누리던 것을 내놓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식민지 시대에도 그런 드문 의인들이 있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진 이회영 형제가 대표적이다. 삼한갑족으로 불리던 이회영의 6형제는 막대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회영의 형제와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해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끌었던 안동 권문세가의 종손 이상룡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가문은 알아도 최진동 형제를 아는 사람은 아직도 드물다. 최진동은 전통적인 명문가의 자손이었던 이회영이나 이상룡과는 달리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총명하고 의기가 높았던 그는 주변의 신뢰를 얻었고, 중국의 공직에도 진출했다.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아버지의 친구였던 중국인 부자는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 친자식이 없었던 양아버지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북간도 일대에 엄청난 토지를 보유한 자산가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토지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조직했던 사병들을 독립군으로 전환하고, 다른 독립군 부대를 후원했다.

 

독립운동사의 전설이 된 봉오동전투의 전적지인 봉오동과 주변의 토지 대부분이 최진동과 그의 형제들 사유지였다. 그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연합해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나아가는 일 만큼이나 물러서는 일도 어렵다. 한때 아름다웠던 사람도 마지막까지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참 어렵다. 무장투쟁에서 물러났던 최진동의 말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1920년대 중반 들어 만주에서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최진동은 중국 정부에 도움을 청했다. 연길도윤공서는 일찍이 중국에 귀화해 중국관리들은 물론 만주의 군벌들과도 가까이 지낸 그를 가야하파출소장에 임명했다. 일본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중국인의 지위를 확보해 봉오동으로 복귀한 그는 온건 자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총애했던 큰아들 부부를 잃은 다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최진동은 아들 부부의 묘지를 날마다 바라보아야 하는 봉오동을 떠났다. 그러나 도문으로의 이사는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일본헌병대는 도문에 있는 그의 토지를 군용비행장 부지로 헌납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거부했다. 헌병대에 끌려가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 가족들은 토지 문서를 일제에 내주었다. 하지만 헌병대에서 풀려난 그는 집으로 돌아온 지 나흘만인 1941년 11월 25일 사망했다.

 

최진동의 아내는 비단 모본단 두 필을 사서 그가 떠나는 마지막 길에 깔았다. 비단옷 한 번 입어보지 못하고 떠나는 남편의 죽음이 원통하고 안타까워서였다. 독립운동에는 언제나 아낌이 없었지만 정작 자신은 춘하, 추동 단벌 양복으로 지낸 그는 죽은 다음에야 비단 모본단을 밟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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