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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쌩가리

 

 

전라도 사투리다. ‘쌩’은 ‘생’의 된 발음으로 날것을 뜻한다. 익히지 않은 본연의 것. 가공하지 않은 본래의 것을 강조하고 싶을 때 첫머리에 붙여 썼다. 이를테면, 쌩고구마, 쌩밤, 쌩고기 하는 식이다. ‘가리’는 ‘가루’를 뜻한다. 사투리 그대로 옮겨 쓰면, 밀가리, 쌀가리, 보릿가리, 미숫가리가 된다. 한참동안 잊고 살았던 전라도 사투리를 다시 들은 건 땅끝 해남에서였다. 세 계절을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보냈는데, 함께 살았던 작가들이 전라도 사투리의 달인이었다. 백련재에서의 하루는 “밥은 묵었소?”로 시작해서 “밸일 없지라?”로 끝났다. 소설 쓰는 이 선생은 완도가 고향이었고, 시 쓰는 박 선생은 광주가 고향이었다. 나 역시 장흥 태생이라 전라도 사투리에는 이골이 났는데, 셋이 모이면 쏟아지는 사투리로 푸지고 질펀했다.

 

그때, 들었던 말이 쌩가리였다. 이 선생의 입에서 나왔는지 박 선생의 말끝에 묻어나왔는지 기억은 없다. 처음 듣는 순간, ‘아, 이런 사투리가 있었지?’ 하고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랄까.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쌩가리에 얽힌 추억이 많다. 그중 하나가 전지분유다.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일곱 살 쯤 먹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드시던 전지분유를 훔쳐 먹다 엄마에게 혼이 났었다. “미친 놈, 할무니 잡술 것을!”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다. 누르스름한 우유가루. 그것이 왜 그리도 먹고 싶었던지. 한 숟가락 떠서 입에 털어 넣으면 바로 녹지 않고 입천장에 달라붙곤 했었는데. 그럴 때 누가 말이라도 시키면, 입에 머금고 있던 우유가루가 뿜어져 나올까봐 우물쭈물하곤 했었다.

 

이제는 전라도에서도 쌩가리라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쓰지 않으니 잊어버리는 건 당연하다. 잊힘이야말로 사멸의 첫 단추인데, 잊히고 사멸하는 게 어디 사투리뿐일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멸의 시대를 산다. 빠름과 편리와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본연의 것들을 망각한다. 생명이 생명일 수 있는 본연의 것들을. 먹고 입고 자는 데 필요한 뿌리 같은 것들을. 우리는 스스로 벼를 심지 않아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산다. 옷도 집도 마찬가지다. 만들어진 옷을 입고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 잠을 잔다. 물론, 모두가 농사를 짓고 옷을 만들고 집과 건물을 세울 필요는 없다. 다만 옷과 밥과 집의 근원이, 그러니까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잉태(孕胎)는 포유류의 전유물이 아니다. 봄은 흩날리는 꽃가루 속에서 잉태하고, 바다는 부유하는 미생물 속에서 잉태하고, 낮과 밤은 녹색별의 뱅글거림 속에서 잉태한다. 알고 보면 볼수록 잉태는 크고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사람 사는 곳도 그와 같아서 잉태하는 모든 것의 뿌리는 작고 단순하다. 거대한 강줄기의 기원이 산기슭에 있는 옹달샘인 것처럼. 전기의 뿌리 역시 석탄과 석유가 아니던가. 그 시커먼 광물이 현대사회라는 초고층시대의 기초이지 않는가. 시커멓고 냄새나는 그것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쌩가리’이지 않는가. 자꾸 눈을 들어 위를 보지 말자. 뿌리가 되고 기본이 되는 것에 눈을 맞추자. 세련되게 가공하였다고 해서 아름답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문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세상살이도 그렇더라.

 

꾸미면 꾸밀수록 묘하게도 조악(粗惡)해지는 게 그것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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