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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민비

 

임오군란(1882년. 고종 19년)이 터졌다. 신식군대 별기군에 대한 구식군대의 불만이 원인인 것 같지만, 실은 나쁜 권력자에 대한 분노였다. 병졸들이 궁궐(창덕궁)로 쳐들어간 것은 민비를 잡아죽이려는 것이었다. 중전은 측근 장정에게 엎혀 현장을 빠져나가서 멀리 충주까지 도망갔다. 

 

군인들은 1년 넘게 월급을 받지 못하다가 받은 쌀가마니에 겨와 모래가 반이나 섞여있는 걸 보고 폭발했다. 그 사이 "월급을 달라!"고 항의하는 군인들을 끌고가서 혹심하게 고문했다. 척족들이 이렇게 빼돌린 쌀이 10만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민비는 왕실과 조정의 요직에 전부 여흥민씨들을 30명 넘게  앉혀놓았다. 핵심 참모집단을 일가친척으로 구성한 것은 통치를 맘대로 하기 위함이며, 같이 해먹는 게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휘다. 그는 선혜청(나라의 곳간)이라는 정부기관의 당상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조선갑부 민영휘의 부정부패였다.

 

민비는 자식 넷을 잃고 세자 하나를 건졌다. 그래서 모성애가 특별했다. 은신처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중전에게 민응식이 무녀 하나를 소개했다. 그 영매가 "50일 안에 권세를 되찾는다"고 예언하며 위로했다. 그대로 되었다. 민비 일행이 환궁하자마자 고종은 무당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봉호를 하사했다. 개미가 코끼리가 된 격이었다. 스스로 관우의 딸이라고 하는 무녀에게 왕실이 관우사당을 지어주었다. 고종과 민비는 이곳을 수시로 찾아 제를 올리고, '말씀'을 들었다. 피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숨어든 곳도 여기였다.

 

진령군은 세자의 건강을 위하여 중전에게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마다 쌀 한섬, 비단 한필, 돈 천냥을 시주케 했다. 매해 여름에는 한강에서 수신제(水神祭)를 지내는데, 이 때는 쌀 500석의 밥을 지어 물고기들을 배부르게 먹였다. 조선 왕조 600년 동안 무당이 '君'이 된 것은 유일한 경우였다. 그녀의 아들도 당상관이라는 큰 벼슬을 받았다. 의관정제하고 어설프게 거들먹거렸다. 母子는 매관매직을 家業으로 하여 거부(巨富)가 되었다. 그 시절 출세욕 쎈 놈들은 이 무당을 '누님' 또는 '어머니'로 부르며 존숭하고 '헌금'을 바쳤다. 역사는 그녀를 '요무'(妖巫)로 기록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목숨 건 권력투쟁을 하던 그 시간에, 국제정세는 병아리처럼 연약한 조선을 잡아먹기 위하여 동서남북 사방에서 표범 같은 맹수들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그 치명적으로 위태로운 시공간에서 죄없는 2천만 민중이 지옥문 앞에 서서 젖먹이들을 안고 벌벌떨며 울고 있었다. 

 

그 확정적 망국의 상황에서도 민비와 대원군, 양 계파의 척족들과 패거리들은 각각 제 욕망을 위하여 머지 않아 당도할 각각의 종말을 재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병탄, 인력과 군수품의 보급기지 삼아 중국 등 아시아 전체를 욱일기가 펄럭이는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그에게는 민비가 제일 큰 장애물이었다.

 

1895년 10월 8일. 해 뜨기 전, 고요한 여명의 시간에 낭인 48명이 경복궁 민비의 침소에 난입하여 암살공포로 늘 선잠을 자던 민비를 난도척살(亂刀刺殺)했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며 증거인멸 하기위해 시체에 휘발유를 끼얹어 태웠다. 뼈를 추려 분쇄하여 궁궐 안에 있는 연못에 뿌렸다. 을미사변의 내막이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는 법이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꼭 해보고 싶다. "만약 민비가 임오군란 때 우리 군인들에 의해서 죽었더라면..." 나의 주관이지만, 그 사건은 우리 역사를 뜨겁고 의로운 에너지로 이끌고 가는 민족정기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점 늘 아쉽다. 

 

 

추신:1)을미사변 때 소위 '낭인'이라고 '불량배'처럼 표현된 이 젊은이들 가운데는 당시 하버드대학과 동경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현직 차관도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도 있었다. 그는 우범선으로, 신식군대의 대대장이었다. 거사의 뒷처리도 그의 몫이었다.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다. 의협(義俠) 고영근에게 암살당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국제여론에 밀려 민비시해범들을 몽땅 기소했지만, 증거불충분 등으로 전원 가볍게 처리하고 석방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훗날 장관, 대사 등 요직에 기용되었으며, 나머지도 예외 없이 영웅대접을 받았다.

 

2)남연군-대원군-고종-순종 4대가 모두 여흥민씨와 짝을 맺었다. 민씨들 가운데 을사늑약에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한 사람은 충정공 민영환 하나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도둑질이나 수탈하다가 폭사하거나 격살되는 등 끝이 좋지 않았다. 대원군은 자신의 처가쪽에서 며느리를 보면, 먹고들어가는 게 있을 것이라 기대했으나 어린 며느리와 긴 세월 목숨 건 권력투쟁을 하다가 비극적으로 끝났다. 민비시해 현장에 대원군이 있었다. 정치의 본질을 가르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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