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럴 때 있습니까.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이 막힐 때. 발가벗겨진 것 같아 숨고 싶을 때. 당신도 나처럼, 놓아버리고 싶은 적 있습니까. 말짱한 세상이 싫어서 취해버린 적 있습니까. 나처럼 당신도, 엉망진창에 누운 적 있습니까. 아마도 없겠지요. 참 쪼잔합니다. 나라는 사람 말입니다. 빨았다 뱉으면 그만인 한 모금 담배 연기 같달까요. 그렇잖습니까. 담배 연기란 게 형체만 요란하고 쓸모없는 것이라서. 훅 뱉어버리면 그뿐, 그립거나 보고파 할 대상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여운은 남는다고요? 웬걸요. 남아봐야 반지하 단칸셋방에 널린 빨래 같아서, 바람 따라 흘려보내고 싶은걸요. 흘러 흘러 먼바다에 가 닿으면 부끄러움도 그만큼 옅어질 테니까요.
그럴 때 있습니까. 통 크게 쏘고 싶을 때. 가격표 보지 않고 사주고 싶을 때. 당신도 나처럼, 주머니만 뒤적이다 돌아선 적 있습니까. 한 번쯤 서고 싶은데, 한 번은 서야 할 텐데. 사람 노릇이 왜 이리 고달픈지. 달력에 표시된 기념일을 볼 때마다 서지 못하고 넘어지는 내가 어쭙잖아서. 하, 이러고도 사내랄 수 있을까. 이리 생겨 먹어도 어른이랄 수 있을까. 친구고 형제고 가족이랄 수 있을까. 쓴물 삼키는 나처럼 당신도, 쓴웃음으로 둘러댄 적 있습니까. 사는 게 다 그렇다고. 알고 보면 다들 거기서 거기라고. 애써 도리질한 적 있습니까. 나는 오늘도 나를 속입니다. 가난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떨리는 손으로 원고지 가득 거짓말을 채워 넣습니다.
그럴 때 있습니까.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어 허무할 때. 헛것으로 산 것 같아 부끄러울 때. 당신도 나처럼, 내세울 게 없나 뒤적인 적 있습니까. 출신도 이력도 살림살이도 변변찮아서, 아들놈 성적표라도 들이밀고 싶은 적 있습니까. 나처럼 당신도, 철 지난 추억 곱씹으며 소주잔 비운 적 있습니까. 나도 한때는, 나도 한때는... 포장마차 뒷골목에 주저앉은 적 있습니까. 그리 보면 참 알량합니다. 나라는 사람 말입니다. 이 나이 먹도록 뭘 했는지. 뭐라도 내밀지 않으면 하찮은 인생 같아서, 빤한 주머니 속만 더듬거리고 있습니다. 그래 봐야 시답잖고 볼품없는 인생살이인데, 아득바득 원고지에 새겨 넣는 걸 보면, 아직도 사람 되려면 멀었습니다.
그럴 때 있습니까. 앞뒤가 바뀐 것 같아서 어처구니없을 때. 이건 아니지, 싶어도 말을 삼가야 할 때. 당신도 나처럼, 돌아서고 싶은 적 있습니까. 간 쓸개 빼주고 돌아서던 날, 막차는 왜 그리도 빨리 끊어지던지. 동전 몇 닢 밀어 넣고 공중전화 돌리다가 허허 웃은 적 있습니까. 자냐, 그냥 전화했다. 배알도 없이 흰소리만 늘어놓다가 타박타박 걸어간 적 있습니까. 나처럼 당신도, 파랗게 멍든 새벽길을 기역이나 니은처럼 가로지른 적 있습니까. 신호등조차 까무룩 잠든 사거리를 디귿이나 리을처럼 횡단한 적 있습니까. 후미진 전봇대 밑에 쪼그려 앉아 시옷이나 지읒처럼 토악질한 적 있습니까. 쪼잔하고 알량한 나는, 이 밤이 저물도록 연필심만 깎고 앉았습니다.
못난 게 살아내느라 욕봤다고. 못남이지 쓸모없음은 아닐 거라고. 헛소리 주절거리며 연필심에 침이나 바르고 앉았습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살아온 나와 당신에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습니다.
참 고생했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