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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 신(神)을 기다리는 이유

 

나처럼 몰랐을까. 몰라서, 신神은 죽었다고 말했을까. 어떤 사람은, 그의 말을 선언이 아니라 절규라고 해석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목격한 자의 고백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신은 사랑이고 정의이며 자비라고 했다. 그런 해석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정말 신은 그 해석대로인가. 그러하다면, 신의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온갖 죄악은 무엇인가. 전쟁과 차별과 혐오는 무엇인가. 그것도 사랑인가. 사랑이라면, 피난민의 천막을 조준하는 총구는 정의이고, 어린 학생의 교실을 관통하는 미사일은 자비인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끝없이 신을 부르짖으며 살아가는데, 정작 인간의 부름에 답하는 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묻는다. 내 안의 나에게 내가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거룩하게 살아서 임하는가. 거룩하게 임한다면, 왜 말이 없는가. 도대체 왜, 사랑은 보이지 않고 정의는 부러지고 자비는 도망치는가. 도대체 어느 구석 어떤 경계에 존재하기에 빌고 또 빌어도 대답이 없는가. 혹시, 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게 아닐까. ‘of our own making.’ 그렇게 태어난 게 종교가 아닐까.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빚어낸 그림자의 형상처럼. 중요한 건, 오늘도 누군가는 그 그림자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발사한 미사일이 적국의 하늘에 심판의 불비를 내리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앞날에 은혜가 아닌 재앙이 임하게 하소서. 도대체 어떤 신의 가르침이 이리도 폭력적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 이해하는 순간, 나도 그 폭력에 동의하게 될까 두렵다.

 

그들은 신을 말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인간의 욕망을 본다. 신의 뜻이라 외치는 입에서 나오는 건 끝없는 분열과 증오, 그리고 돈이다. 당연히 믿음은 숫자로 계산되고 교단은 재벌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당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가. 낮은 곳에 임해야 할 십자가는 세상 꼭대기에서 날마다 당당하다. 중생의 눈물을 외면한 자비는 불단 앞에 쌓이는 공양물의 공덕과 찬탄 속에 거룩하다. 기도는 값비싼 음향기기 속에서 흩어지고, 신의 메시지는 편집되어 자막으로 나붙는다. 녹음되고 편집된 메시지에도 사랑과 헌신은 존재할까. 있다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종교는 정말 신을 섬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신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그럼에도 나는 신을 믿는다. 무너지고 삐뚤어진 종교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이니까. 신의 이름을 팔아 치부하고 득세하는 무리를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역시 그분이니까. 내가 신을 우러름도 그래서다. 나는 신을 흠모하고 경외한다. 신을 모신다고 지은 온갖 건물을 흠모함이 아니다. 나는 교회와 사찰을 경외하지 않는다. 나의 우러름의 대상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가르침이고, 모두가 부처일 수 있다는 신의 깨우침이다. 인간의 탐욕을 넘어서려는 노력과 의지가 없다면, 종교는 언제까지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여전히 나는 신을 기다린다. 그분이 보낸 응답이 이미 우리 자신에게 존재함을 깨닫는 그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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