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만큼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정신을 단련하는 것을 그만두면 그 순간부터 너는 육체의 포로가 된다. 진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미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온갖 종류의 나쁜 영향들이 무서운 힘으로 그들을 덮치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특별한 불굴의 정신으로 진리를 탐구해 그것을 붙들어야 한다. (류시 말로리) 애매한 것은 끝까지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어려운 일은 끝까지 참을성 있게 해내야 한다. (공자) 이성에 대한 애착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네 마음은 젖을 빠는 송아지가 어미 소의 품에 매달리는 것처럼 지상적인 것에 매달릴 것이다.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덫에 빠진 토끼처럼 몸부림친다. 육욕의 쇠사슬에 묶인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되풀이되는 괴로움에 빠진다. (부처) 자기개선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작업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죄악에 붙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죄악이 자기개선의 길을 복잡하게 하고 어렵게 만든다. 그 죄악이 우리 안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그만큼 괴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
부는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주지 않는다. 부가 늘어남에 따라 욕망도 커지기 때문에, 부가 크면 클수록 욕망의 만족도는 낮아진다. 우리의 재물욕에 적당한 한계를 두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그 점에 대한 사람들의 만족도는 어떤 사람의 절대적인 크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크기, 즉 그 사람의 욕망과 재산의 크기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므로 재산 그 자체는 분모가 없는 분자처럼 지극히 의미가 적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싶어 한 적이 없는 것, 그래서 그에게는 필요 없는 것은 없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런 반면 그 사람보다 백 곱절이나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법이다. (쇼펜하우어) 좀 더 재산이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 들 때는 즉시, 실은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거라고 고쳐 생각하는 것이 좋다. (리히텐베르크) 조금밖에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 가난한 것이다. (세네카) 욕구를 적게 가지고, 그 적은 욕구도 스스로 충족시키며, 모든 기회를 이용해 얻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주고자 하는
종교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얘기한다. 윤리학은 인생에 대한 종교적 이해에서 생기는 삶의 지침이다. 신에 대한 최상의 예배는 아무런 목적 없이 하는 행위이다. 신에 대한 최악의 예배는 목적을 갖고 하는 행위이다. 지고한 존재를 우러르는 자는 모든 피조물 속에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그니 푸리나) 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일종의 폭력 행위라는 것, 그리스도가 말한 어린아이를 유혹하는 일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떻게 우리에게 대다수 사람들이 부정하고 있는 삼위일체니, 부처와 마호메트와 그리스도의 기적 같은 것을 그럴듯하게 설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가르쳐도 되는 것,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모든 종교에 공통되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 즉 도덕적인 사랑과 합일의 가르침이다. 부처는 말했다. “세상에 어려운 일은 수없이 많다. 가난하면서도 자비심이 깊은 것,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도 종교적인 것, 육욕과 번뇌를 억제하고, 좋은 것을 보아도 탐하지 않는 것, 모욕을 받아도 참는 것, 만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무
진정한 현자는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심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고와 탐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모르는 것을 남에게 묻는 것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 학문을 배우고도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지 않는 사람은 모처럼 밭을 갈아 놓고 씨앗을 뿌리지 않는 사람과 같다. (아라비아의 아르비테스) 철학이나 자연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보통 사람들이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단순히 그럴 수도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리히텐베르크)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 (바울) 우리의 영혼에는 양식이 부족한 일이 없다. 그것을 자기 몸에 섭취하는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과거에 존재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요소는 육적, 지적, 정신적인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을 지배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할 일이다. (류시 말로리) 참된 지혜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여러 가지 나쁜 일, 즉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하기는 매우 쉽다. 우리에게 선이자 행복인 일을 하려면 크게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다) 지혜에 이르는 길은 결코 백합꽃이 피어 있는 잔디밭을 지나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항상 초목이 자라지 않는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가야 한다. (존 러스킨) 진리의 탐구에는 항상 동요와 불안이 뒤따른다. 그렇더라도 진리는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너는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진리 쪽에서 먼저 나타나면 된다고 너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진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네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진리를 찾아라, 진리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 (파스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예수) 끊임없이 선량한 삶에 마음을 쏟는 사람만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통증은 일을 할 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비명이 나올 정도로 심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노동은 선은 아니지만 선한 생활의 필수 조건이다. 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노동과 걸식과 도둑질이다. 만약 노동자의 몫이 적다면 그것은 거지와 도둑의 몫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 놀고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가혹한 노동을 하고 있다. 배불리 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굶주리고 있다. 게으른 자들이 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줄여주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노동을 덧붙이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치스러운 놀이는 모두 그런 것이다. 처음에 노예는 자신의 군주가 권력을 누린다는 사실에 불평하지 않고, 다만 군주의 폭정에 불평할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전태일)/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행복은 결코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나날이 새롭게 완성으로 가는 길을 걷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을 배우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벗에게 편지를 써야 하는지 쓰지 말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음악은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켜는 것을 가르쳐주지만, 언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켜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직 이성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줄 수 있다. 우리에게 이성을 부여함으로써 신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우리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준 것이다. 지금과 같은 나를 창조한 신은 어쩌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에픽테토스야! 나는 네 보잘것 없는 육체와 초라한 운명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서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나는 너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는 대신, 네 속에 나 자신의 신성의 일부분을 불어넣었다. 나는 너에게 선을 향해 나아가고 악을 피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나는 네 속에 자유로운 이성을 주
어린이들에게는 크고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이것이 당신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 왜 어린이는 대부분의 어른들보다 도덕적으로 높은가? 그들의 이성은 미신에 의해서 유혹에 의해서도 죄악에 의해서도 비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완성으로 가는 길 위에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어른들에게는 죄와 유혹과 미신이 가로막고 있다. 어린이들은 그저 살기만 하면 되지만, 어른들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완성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청정무구한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얼마나 무서운 곳이 되었을까! (존 러스킨) 아기들은 종종 그 고사리 같
의심해 보는 것은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견고하게 한다. 불신은 사람이 무엇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티노) 이따금 영혼의 삶을 믿지 않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은 불신이 아니며, 그때 우리는 육체의 삶을 믿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은 영혼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갑자기 죽음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그것은 무언가로 인해 머리가 멍해져서, 또다시 육체의 삶이 진정한 삶이라고 믿을 때 흔히 일어나는 일로, 마치 연극을 열심히 관람하고 있는 사람이 무대 위의 세계를 현실로 생각하고 그것에 공포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인생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러한 환각의 순간에도 신앙이 바른 사람은, 자신의 육체적 생명 속에 사는 것은 결코 자신의 진정한 생명의 행복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영혼이 침체에 빠지는 시기에는 자신을 환자로 생각하며, 가능한 한 조용히 있는 것이 중요하다. 현자는 가장 좋은 정신 상태에 있을 때도 회의를 품는 수가 있다. 자유자재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기초를 이룬다. 참된 신앙에는 언제나 회의가 따른다. 만일 내가 의심하지
토지의 사유제는 노예제도, 즉 인간의 사유제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정의에 어긋난다. 맨 처음 누군가가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믿어 준 마음씨 좋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지금과 같은 시민사회의 창시자이다. 그런 때, 그 말뚝을 뽑아버리고 도랑을 메운 다음, “조심하시오, 이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맙니다. 만약 땅은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고, 땅에서 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것임을 잊는다면, 여러분은 모두 파멸할 것이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인류는 그 많은 범죄와 전쟁과 살육과 불행과 비천함에서 구원 받았을 것을! (루소) 단순히 공정함이라는 면에서 봐도 토지의 사유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땅의 일부가 한 개인의 사유물이 되어, 마치 그에게만 소유권이 있는 물건처럼 그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그 한 사람이 사용하도록 점유되는 것이 공정한 거라며, 그 밖의 땅도 모두 똑같이 사유물이 될 것이고, 결국은 땅 전체가 그렇게 되어 지구 전체가 온통 사유재산 투성이가 되기 때문이다. (허버트 스펜서) 현재의 토지 사유권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