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신제품이 출시될 때 며칠 전부터 줄이 늘어서 있고 샤오미에 열광하는 미펀이라는 팬덤이 있어 2015년 미펀제에서는 12시간 만에 212만 대의 스마트폰이 팔리는 기네스 기록이 세워졌다. 팬덤의 등장은 대중문화에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20년 국내 10대 트렌드로 팬덤경제 부상을 꼽았다. 대중문화적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팬덤이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어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팬심으로 소비하는 팬슈머(Fansumer)는 연예인을 넘어 기업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2020년 9월 코로나로 대면콘서트가 불가능할 때 BTS는 방방콘 더라이브란 이름으로 BTS 팬 플랫폼 위버스에서 온라인 공연을 했다. 107개국 75만 명이 동시 관람하면서 순식간에 25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 세계 아미의 열정적 팬덤의 결과다. 대중연예인에게 팬덤은 생존과 성장의 조건이다. 2010년대 들어서는 연예인뿐 아니라 기업, 정치인까지 팬덤의 대상이 되었다. 팬덤경제학의 저자 데이비드 스콧은 기업이 불멸의 브랜드를 갖기 위해선 고객을 팬으로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이폰이나 할리데이비슨을 보면 고개가 끄떡여진다. 90년대 고객만족의 마케팅이 고객감동을 지나 이젠 팬덤 확보로 진일보했다. 하다못해 기자도 팬덤시대에 편입되었다. 독자가 구독 버튼을 누른 언론사와 기자의 기사가 우선 노출되니 확보한 팬덤이 많을수록 기사가 많이 읽힐 수밖에 없다. 팬덤은 브랜드 파워의 핵심이다. BTS도 아미라는 세계적 팬덤이 SNS를 통해 만들어낸 성공사례다. 정치에서 팬덤의 원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무현의 원칙에 공감했던 노사모는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 올린 공로자다. 노무현 외에 팬덤을 확보한 정치인으로 박근혜, 문재인, 이재명을 들 수 있다. 노무현과 박근혜 두 정치인의 팬덤 기반은 확연히 다르다. 노무현의 팬덤은 자생적 집단이고 30대 고학력의 회사원을 중심으로 노무현의 원칙, 철학, 삶의 가치에 동의하는 깨어있는 집단이다. 박근혜의 팬덤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측면이 강하다. 박근혜를 통하여 박정희의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원로 정치인 유인태의 말이다. “정치인에게 강력한 팬덤이 있다는 건 자산이지만 끌려다니는 건 망하는 길이다.” 노사모는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말미암아 대깨문이라는 강성 지지층으로 변했다. 비판의식이 실종되고 안타까운 노무현 후계자인 문재인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변모하면서 팬덤의 역기능이 나타났다. 핵심 지지층만을 위한 정치는 때때로 보편적 국민정서와 유리될 수 있다. 정치인에게 강력한 지지기반인 팬덤은 아무나 갖지 못한다. 다만 열성 지지자가 전 당원, 전체 국민을 대변하지도 못한다. 강하게 의사 표시하는 열성 지지자가 정치 지도자와의 직접적 교감을 통하여 정치 어젠다를 결정하게 되면 대의민주주의는 위축되고 정당의 역할은 축소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토론, 협상, 타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프로세스이기 때문이다. 역기능이 제거되지 않은 팬덤은 때때로 정치를 파행시킨다. 팬덤정치의 창시자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지지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도 감시하고 나를 흔드는 사람도 감시해달라”라고 한 말이 귀에 어른거린다. 물건은 맘에 들면 사면 그만이고 스타는 좋아하면 그뿐이다. 정치는 패자에게서도 소수에게서도 들어야 할 말이 있다. 모두 다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같은 팬덤이지만 정치팬덤과 경제팬덤의 차이다.
우리말 중에 포르투갈에서 온 단어들이 있다. 우리가 일상용어로 쓰는, 빵, 담배, 카스테라, 사라다, 끼같은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포르투갈에서 직접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역사적, 지역적으로 너무도 멀고 먼 포르투갈 말이 어떻게 일본에 흘러든 것일까. 포르투갈은 유럽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다. 1549년, 포르투갈인을 태운 중국배가 악천후로 표류하다 일본 다네가 섬에 닿는다. 포르투갈과 일본의 첫 만남이었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는 동서양의 다양한 문물을 주고받는 교역국이 된다. 이렇게 일본에 스며들게 된 포르투갈어가 일본식으로 바뀌어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것이다. 교역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우리 조선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서양인도 포르투갈인이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하멜보다(1653년) 70년 앞서 도착한 서양인에 대한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 나와있는데 그 시대에 중국, 일본 등 극동과 활발히 교역하던 이들이 대다수 포르투갈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문헌은 아니지만, 영국 역사가 찰스 복서의 '포르투갈 해양제국'이란 책에 '1577년, 일본으로 가다 표류해 조선땅에 이른 포르투갈인 도밍고스 몬테이루 선장'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의 주역은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유럽 서쪽 끝 약소국인 포르투갈이 어떻게 그 나라들보다 앞서 대항해시대를 연 것일까. 기원전 12세기에 페니키아인이 건설했고 켈트족도 건너와 살았다는 이 땅의 이후 역사는 끊임 없는 강대국의 침탈로 얼룩져있다.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서고트족, 이슬람 세력 등이 차례로 이 땅에 쳐들어왔는데, 특히 로마는 약 400년, 이슬람 세력은 약 500년이란 장구한 기간을 장악했다. 그래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한 것은 포르투갈이 스페인보다 앞섰다. 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1492년보다 70여 년 앞서 세계 곳곳을 누빈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1415년,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북아프리카 세우타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 3개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건설하며 해양대국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580년, 왕가의 분규로 60년간 스페인 지배를 받았고, 또 식민지 전쟁에 합세한 영국과 네덜란드 등에 밀렸다. 19세기 들어서는 프랑스 나폴레옹의 침략,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정치 사회의 혼란 등으로 다시 예전의 유럽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민중음악 파두는 포르투갈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 부침이 만들어낸 음악이다. 해양왕국 시절은 물론 이후에도 바다는 포르투갈인들에게 엘도라도였다. 수많은 이들이 모험과 개척을 위해 미지의 배에 올랐다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바닷가에서 기약 없이 남편을, 애인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애끓는 심사, 죽어돌아온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소리,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절망의 한숨……이 모든 것이 파두를 만들어냈다. 기원을 알고 들으면, 울음같고 한숨같고 절규같은 파두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도 파두가 낯설다면 이 절창을 들어보시길 바란다. 파두는 시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노래다.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이 모든 것이 파두(Tudo isto e fado)’. 어느날 당신이 내게 물었지/ 파두가 뭔지 아느냐고/…중략…/ 지금 말해줄게/ 패배한 영혼들, 길잃은 밤들/ 모우라리아의 이상한 그림자들/ 한 녀석이 노래를 하고 기타들은 울고/ 사랑과 질투, 재와 화염, 고통과 죄/ 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이 슬프고 이 모든 것이 파두라고…후략… (모우라리아는 리스본의 파두로 유명한 마을) 해양왕국 포르투갈의 그림자, 포르투갈 민중의 상처가 파두다. 그 파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된 것을 보면 아니러니다. (인터넷 창에서 www. 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어떠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사명을 두고 있는 사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아직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진리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보이는 지고한 빛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이해하고, 그 빛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지만, 진리에 둔감한 사람들은 과거의 인생관, 과거의 생활 방식을 고집하며 그것을 옹호하려고 한다. 신앙상의 모든 기만 중에서 가장 잔인한 기만은 어린이들에게 그릇된 신앙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가 어른들에게 이 세계와 자신의 생명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 그 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였을 때, 거기에 대..
코로나 대유행의 시기는 지났지만 코로나로 인하여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아픔은 여전하다. 근로자가 코로나로 인하여 사망하는 경우, 유족은 이것이 산재로 인정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나 코로나 감염경로를 파악하기 힘든 요즈음은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근로자의 코로나 감염이 업무수행과 관련성이 있고, 코로나가 근로자의 사망과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산재로 인정되어 유족급여를 수령할 수 있다. 근로자가 코로나에 감염되었으나 그 감염경로 파악이 어려운 경우에는,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 중 감염될 가능성과 업무 이외의 사적 활동에 의하여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비교·평가하여 업무관련성 인정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 코로나 감염자에 대하여 역학조사를 하던 시기에는 비교적 근로자의 동선에 대한..
이태원의 핼러윈 축제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참사는 세월호 참변 이래로 또다시 전 국민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주었다. 일주일 가까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참혹한 사진과 영상이 떠나질 않는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나라가 되었는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 자랑스러웠던 대한민국의 국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착찹하기 그지없다. 일제하 3·1혁명이 세계 곳곳에 각인된 이유는 그 시위 방법이 평화적이고 비폭력이었기 때문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 전국의 거리를 붉은 티셔츠로 물들이며 열광했지만, 쓰레기 하나 없이 돌아가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인 우리였다. 촛불혁명 때도 민심의 거대한 물결과 함성이 터졌지만 차분했고 질서정연했다. 전 세계가 부러워했던 민주시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혹자는 서양귀신 놀이에 빠진 청년들을 비판한다. 외국 것이라고 탓하자면 크리스마스는 왜 명절이 되었고, 불꽃놀이는 왜 하고, 부처님오신 날의 연등행사는 또 왜 하는가. 문화는 자연스럽게 전파되고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변용되어 흡수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핼러윈 축제도 그들 MZ세대에게는 이미 유치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놀이였다. 우리가 호되게 질타해야 할 대상은 무능함의 정수를 보여준 정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행정안전부장관, 서울시장, 용산구청장, 경찰청장, 용산경찰서장 등 참사의 책임자들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정치를 무시하고 불신하는 대통령의 인식에 있다. 그는 아직도 정치인이 아닌 철저한 검사 같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 집단의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해 다른 주장들을 조화시켜 화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정치이지만, 대통령은 오로지 조사, 압수, 압박, 수사만이 있는 듯하다. 잘 숙련된 정치인이 와도 어려운 대통령 비서실은 측근 검사들로 채웠고 내각 대부분도 검사 아니면 비정치인들이다. 정치불신은 야당관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주사파와는 협치할 수 없다는 공언은 야당은 반국가세력으로 곧 수사대상이라는 선언이다. 야당 없는 국정연설을 하면서도 의기양양하다. 측근 중의 측근인 법무장관은 국회의원의 의혹 질문에는 건건이 발끈하며 뭘 걸라고 한다. 시장의 야바위꾼보다 못한 자들이 정치인이라는 인식이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로 한 사회의 건전함과 건강성을 부여하는 장치다. 그 중심은 국민이고 방법은 여당과 야당의 협치이건만 현재는 정치의 부재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시스템에 의해서 움직이기보다는 하나같이 위로 향하는 충성심에 의해서 작동한다. 정부의 모든 행정이 이러하니 이태원 위기 신고전화를 무시한 경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화와 타협의 정치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들에 의하여 국가가 모두 제 자리와 역할을 잊었다. 그사이에 애꿎고 소중한 청년들의 숨이 멈췄다. 삼가 고인들의 희생에 명복을 빈다.
동북아정세와 세계 경제안보의 격랑속에 한국경제의 위기 신호가 곳곳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10월 기준 무역수지가 7개월 연속 최장기 적자를 기록했고, 믿었던 수출마저 24개월 만에 처음으로 전년 동월대비 감소세(-5.7%)로 돌아섰다. 또 지난 9월 통계를 보면 경제의 세 축인 ‘생산(-0.6%)‧소비(-1.8%)‧투자(-2.4%)’가 전월대비 일제히 하향세를 보였다. ‘트리플 감소’는 경기하강의 확실한 지표라는 점에서 비상이다. 이같은 경제상황은 전 세계가 미중패권 경쟁과 우크라이나 사태, 공급망 교란 등에 따른 대격변기의 초입에 서 있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스럽다. 북한은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확정과 함께 연일 도발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다. 이에따라 한국의 경제안보 외교 공간도 협소해지며 한미동맹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마이산(馬耳山)에 가서 이갑용 처사가 쌓았다는 돌탑 앞에 섰을 때다. 이 탑을 쌓은 노인은 전국을 다니며 돌을 골라 가져다 탑을 쌓았다고 한다. 어떤 의미를 두고 쌓았기에 탑은 폭풍 번개에도 끄떡없이 견디며 오늘을 가고 있을까. 말 귀를 닮았다는 산에 이 탑을 쌓은 속 깊은 뜻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다 ‘나는 지금 무엇 하며 살아 왔는가?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글 짓는 것 제하고는 어떤 재주도 능력도 좋아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자발적 소외와 자가 격리 같이 스스로 외로워했고 고통스런 생각 끝에 손짓의 언어들을 원고지에 옮겨 심는 생활이었다. 혼자서 그늘진 곳에 우두커니 밀려나 외로움을 타는 슬픈 정조(情操)를 지닌 삶이었다. 그때였다. 이갑용 처사가 돌탑을 쌓았다면 작가는 글탑을 쌓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글..
제봉 고경명( 霽峰 高敬命. 1533~1592). 큰 시인이요, 의병장이었다. 장흥이 본관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조선의 고위관료를 지냈다. 약관 스물에 진사시험 장원, 스물 여섯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영광은 예외 없이 고난을 수반한다. 사시사철 온몸에 질투와 시기의 화살을 맞기 때문이다. 그걸 감당하지 못하고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제봉은 승승장구하다가 임관 5년만에 정치사건에 휘말렸다. 파직되어 낙향한다. 31세였다. 이후 약 20년 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창공의 별과 같은 호남 최고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1300수에 달하는 시를 지었다. 제봉집에 담겨있다.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백호 임제, 손곡 이달,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등과 교류했다. 고경명은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당연히 요직에 봉해졌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가슴 뜨거운 충절지사에게 불패의 탄탄대로는 없다. 두 차례의 파직을 겪었다. 우국애민(憂國愛民)정신과 자부심만큼 좌절과 회한도 깊고 컸다. 홍안의 청년이 백발이 서리로 내린 초로(初老)가 되었다. 바로 이 때, 조총을 든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1592년 4월. '朝日 7년 전쟁'(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왜군들은 보름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하였다. '머저리' 선조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왕초'가 이 따위면 없는 게 낫다. 영웅은 그 절망의 시간에 등장하여 역사가 된다. 고경명은 임진년 1592년,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길을 택하였다. 그 해 제봉의 나이, 60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80쯤이다. 나랏님의 은덕을 입은 선비로서, 공맹을 공부한 유생으로서, 자부심 높은 지식인으로서, 지행일치의 인격자로서, 제봉은 '세독충정'(世篤忠貞:대대로 독실하고 진정하게 우국애민의 충성을 다함)의 신념을 실천할 기회 앞에 선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창의구국(倡義救國)의 횃불을 높이들고 6000명 넘는 의병을 모아 금산성에서 각각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고경명과 차남 고인후, 진주성 전투에서 남강에 투신 순절한 장남 고종후의 죽음을 삼종사(三從死)라고 했다. 실은 제봉 가문은 이 전쟁에서 9명이 순국했다.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집안과 제봉 고경명 집안은 이미 임진왜란 때부터 400년 동안 사돈간이다. 제봉의 장남 고종후가 석주의 14대조 고모와 가정을 이뤘다. 영호남의 항일 독립운동 명문가의 이 혼사는 소중한 연구과제다. 고경명의 후손들은 집안자랑을 하지 않는 가풍이 있다고 한다. 지난 10월 18일 광주에서 <의병장 제봉 고경명 선생 순국 제 430년 추모학술대회>가 열렸다. 인문연구원 '冬孤松'의 유미정 박사는 '제봉 고경명 선생의 交遊詩에 담긴 詩情연구'를 발표하여 '시인 고경명' 본격연구의 큰 문을 열었다. 그는 "호남 의인들에게 전해온 文人 제봉의 순절은 학행일치의 한 면을 보였고, 그 후 한말 호남의병 녹천 고광순(제봉의 12대손)이나 광주학생독립운동가, 독재에 맞선 민주열사들, 5•18까지 호남 정신의 맥을 이어오게 했다" 고 평가했다. "세상사람들은 남쪽지방에 시인이 많으나 고제봉이 제일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남쪽에 의병이 많았으나, 역시 제봉이 창도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1556~1648)의 평이다. 상식과 교양, 양심과 구국충정의 리더십을 볼 수 없는 이 야만의 시대에, 제봉 고경명은 우리 모두의 등대다.
이태원 참사로 온 나라가 충격과 슬픔에 잠겨있다.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선감학원 진실 밝히기’도 그 중의 하나다. 본보는 최근 세 차례에 걸친 기획기사를 통해 선감학원 설립부터 폐원 후 진실규명 결정까지 80년 세월 속 과정들을 짚었다. 기획기사 가운데 두 번째는 상처 입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이게 과연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인가, 그것도 국민들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공무원들이 한 일이었던가 분노마저 치솟았다. 지난 10월 20일 가해자인 경기도는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40여 년이 지난 2020년 12월 10일 아동피해대책협의회(회장 김영배)는 166명의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당시 이재강 전 도 평..
2022년은 북한의 무력시위 한 해가 될 것 같다. 북한은 연초부터 탄도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하더니 8월 한미합동훈련을 계기로 핵무기의 선제적 공격 가능성을 공표하면서 전술핵 운용부대 군사훈련을 명목으로 단거리 및 중거리,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발사하였다. 10월 들어서는 2018년9월 남북군사합의에 따른 육상 및 해상 완충구역내에서의 포사격을 실시하면서 남북간 긴장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앞으로 군사정찰위성 또는 우주개발을 위한 인공위성이라고 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와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판단되는 7차 핵실험, 그리고 우리 군사 활동이나 대북전단 등을 이유로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과 같은 무력도발, 그리고 사이버 테러 등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무력시위는 미중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대립구도하에서 ‘러시아 따라하기’ 성격이 짙지만 미국이나 한국에 대한 불만과 대항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한반도 정세를 북한 주도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어려운 것은 핵무기는 남한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선전도 포기하고 전술핵 무기의 공격대상이 남한 주요군사지휘시설 등이라고 밝히는 북한의 경직된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당장 내일이라도 조건없는 대화에 나서겠다고 하면 언론보도에서 긴장정세는 사라지고 대신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주제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 결과와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전망이 보도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과거 남북 대립국면에서도 북한이 이산가족 카드를 들고 대화 무대로 나오면 우리가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였고 그 결과 남북 긴장상황 보도가 이산가족들의 감동적 상봉내용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즉 북한이 대결자세를 보이면 남북관계가 긴장되고 반대로 협력적 자세로 나오면 남북관계가 표면적으로 평화 협력의 상태를 유지하였다. 단순하게 보아 남북관계 변화는 북한 변수가 중요하고 북한을 변화시키고 움직이기 위한 우리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북한이 경직된 사고와 대립적 태도를 버리고 우리 및 국제사회와 대화 협력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북한이 무력도발을 하면 할수록 우리 및 국제사회가 겁을 먹고 굴복하는 대신에 북한 민생과 경제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제재 증대만 가져올 뿐이라는 점을 북한이 체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의 지원이 북한의 경제난과 북한 지도부의 경제강국으로 가고자 하는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2016년이래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지금의 무력시위가 아닌 우리 및 국제사회와의 대화협력 무대로 나서는 것이다. 북한의 지도부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