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 줄 글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얻고 잃음의 반복이지만, 가을에 부디 아프지 말라고 시가 위로를 건넨다. 점점이 붉어지는 단풍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웃고 있을 사람을 생각한다. 수고로이 얻은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가을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 10월의 단풍을 아니 보고도 가을을 보냈다 할 수 없다. 쫓기는 원고에 매달려 풍경을 잃어버릴 즘 오랜만에 생각나는 지인에게 살뜰한 전화를 건네면 이미 좋은 곳을 찾아 휴일을 즐기고 있다. 아직 번듯한 명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말이라도 공손할 일이다. 감질 거리는 생각한 줄 쓰려고 무수한 날이 필요하겠지만 잊는 것도 순간이다. 떠나려고 단풍은 저리도 몸서리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여기까지 올 수 있다. 부디 아프지 마라. 아무도 모르게 떠나면 쉽게 잊힌다. 먹고살기 힘들어 고향을 떠난 때가 어제 같은데, 건강식만 골라먹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야지. 주위를 둘러보면 아픈 사람이 꽤 많다. 쌀이 없어서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오니 고질적인 위병이 사라졌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병으로…
세상 사람들이 수많은 진리의 높은 계시 중에서 지금은 이미 시대에 뒤처져버린 가장 낡은 것만 받아들여, 간명하고 솔직하고 자주적인 모든 사상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대부분을 기를 쓰며 반대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소로) 인류의 종교적 의식은 결코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더욱 순수해져 간다. 만약 누군가가 고정된 관념을 고집하면, 설사 그것이 옳은 관념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미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기둥에 비끄러매는 사람과 같다. 지금에 있어 진리라 하더라도, 더 높은 단계의 발전을 저해한다면 미망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유해한 미신의 하나는 세계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창조주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창조주의 신을 생각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필요도 없으며(중국인과 인도인들에게는 그런 관념이 없다), 또 창조주 또는 주재자로서의 신의 관념은 그리스도교의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 영혼으로서의 신, 사랑으로서의 신의 관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냉혹하며 고뇌와 악을 허용함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영혼으로서의 신은 고뇌
1.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어린 나이라도 자잘한 추억들이 남아 있을 법하다. 그런데도 몇 가지 파편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속에 남아있는 게 없다. 그중 하나. D시 달성동 329번지, 한옥 집 대청마루. 어느 봄날의 오전이었을 게다. 동쪽으로 네모난 창에서 비쳐든 햇살이 마루 저쪽까지 길쭉하니 하얀색 꼬리를 빼물고 있었으니. 양철 바케스 안에서 자라 서너 마리가 숨을 들이마시느라 뻐끔대며 물 위로 코를 내밀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참동안 아팠다가 회복된 나를 위해 자라를 잡았던 모양이다. 어여 마셔라, 크고 하얀 사기 대접에 넘치는 생피의 비릿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그걸 다 마셨다. 그렇게 해야 어머니가 좋아할 것을 아니까. 가톨릭계 사립인 H초등학교 입학 추첨에서 떨어진 날도 기억이 난다. 바람이 무척 매서운 날이었다. 추위를 피해 성당 건물 한 켠 양지바른 곳에서 손을 잡고 기다리다가 잘못된 ‘은행알’ 골랐다는 최종 발표에 그만 울어버렸다. 그리고 입학한 동네 근처 S초등학교 입학식 날. 왼쪽 가슴에 핀을 꽃아 늘어 맨 손수건이 조금 비뚤어졌던가 보다. 어머니는 군청색 한복 두루마기 자락을
정부의 ‘여성가족부(여가부) 폐지’ 방침에 대한 반발 민심이 심상치 않다. 전 정부에서 여가부가 정치적 시빗거리로 등장한 일은 뼈아픈 대목이지만, 대선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폐지론에 갇혀서 선택지를 좁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윤 대통령도 “여성·가족·아동·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만큼 대선 초반의 최초 공약대로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는 쪽으로 선회하여 극심해지는 젠더 갈등을 끝내는 게 현명할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관련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 조직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뼈대로 하는 정부 조직개편안을 밝히자 야당과 여성단체 등을 필두로 반대 목소리가 거칠게 쏟아져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론으로 개편안을 반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민간단체들도 일제히 반기를 들고 있다. 전국 195개 여성·시민·노동단체가 공동 주최한 집회에서는 정부가 여가부 폐지를 밀어붙이면 ‘정권 퇴진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지난 정권에서 여가부가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자진하여 정쟁거리가 된 허물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권 인사들의 잇따른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해괴한 용어를 창조해 2차 가해를…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기 속에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의식의 눈뜸이야말로 복음서가 부활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열매가 익으면 꽃잎은 진다. 네 속에 신의 의식이 자라기 시작하면 너의 약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비록 천년에 걸쳐 어둠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해도 빛이 그것을 뚫으면 이내 환해진다. 네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해도 신이 그 속에서 눈을 뜨면 당장 환하게 밝아진다. (바라문의 잠언) 자존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신을 보는 데서 생긴다. 그러므로 자존심의 근원은 종교 안에 있다. 그 가장 좋은 예는 겸허함 속의 위대함이다. 어떠한 귀족도 황후도 자존심이란 의미에서는 성자와 비교될 수 없다. 성자가 겸허한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그가 느끼는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머슨) 사람을 아는 지자(知者)이지만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진정한 현자(賢者)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신도 알게 된다. (동양의 지혜) 신은 네 가까이 있다. 하느님은 너와 함께, 그리고 네 속에 있다. 신의 영혼은 우리 속에 있고, 언제나 우리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장범준이 부른 “멜로가 체질”의 OST 다. 나영석 PD가 “신서유기” 후속으로 새로 기획한 ”뿅뿅 지구 오락실” 이 방송되자마자 화제다. “신서유기”도 튀었지만 이번 출연자는 래퍼 이영지가 2002년생, 아이돌 그룹 바이브의 안유진이 2003년생 등 M세대의 막내 1명과 Z세대의 3명으로 구성되었다. 영지와 나PD 간에 벌어지는 티티카카는 X세대와(나영석) Z세대의 차이를 절로 느끼게 한다. 영지에게 놀림받느라 영석이 형 매우 고달프다. “지금 몇 년 차인데 그래… 옛날 사람이구나” 독일 사회학자 만하임이 말한 존재의 사유 구속성이란 개념이 있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시공간적 구조, 경제구조 등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말이다. 세대가 다르면 각 세대별 존재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유도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샴푸는 럭키화학이 1976년 발매한 “유니나”다. 그 이후 나온 허벌 샴푸, 창포 샴푸, 홍삼 리앤 샴푸 등 모두 자연의 향을 담기 바빴다. 그런데 웬걸? 꽃들 속에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대. 베이비부머 세대와 X세대는 자연의 향을 제품에 옮겨오는데 열중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
‘심심한 사과’라는 말이 한글날 즈음에 논란이 됐다. 사과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심심하면, 당연히 아니 된다. 마음 전해지도록 진해야 하고, 간간해야 한다. 따분하고 맛없으면 되겠는가. (언어) 전문가들도 걱정한다. ‘심심한 사과’는 문해력 결핍의 상징과도 같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슬그머니) 내미는 계기로 삼지 말라는 ‘경고성’ 칼럼도 눈에 띄었다. 그 칼럼의 한 대목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사회 일각에서는) 딴 생각 말라.’는 취지의 주장이 쟁쟁하다. 이런 논의는 이집트상형문자나 갑골문 같은 어원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좀 불편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한국어의 어휘와 시민의 어휘(능)력을 망가뜨리지 말자는 것이다. 한자교육은 그 다음의 주제다. 그 논설의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라는 대목을 거푸 읽는다. 이런 생각에 부응하는 연구와 성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된다. 이번 경우, ‘심심하다’에 ‘맥없고 맛없다.’는 뜻 말고도, ‘마음의 드러냄(표현)이 깊고 간절하다.’는 뜻도 있음
1. 그의 이야기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렸어요. 핏기 없이 희고 창백한 얼굴이었죠. 신비로웠어요." 일본 농부라 자신을 소개한 그는 그녀를 회상했다. 네팔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자에게 묘한 떨림을 느꼈다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에서 시작된 한일 간 운명적 러브스토리였다. 차마 고백할 용기가 없던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뜻밖에 그녀였다. 여자는 일본 지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도와 달라 부탁했다. 그녀가 불러주는 안부를 일본어로 옮기면서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은 떨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밤을 붙잡으며 새벽녘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다음날 그녀는 사라졌다. 이른 아침 체크 아웃을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고 했다. 절망감에 그는 사라진 그녀를 찾아 다녔다. 강기슭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기적처럼 그녀를 발견했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 몰려든 네팔 꼬마 아이들과 뒤섞여 노는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회했다. 그는 내게 이국땅에서 운명처럼 만난 신비한 사랑에 대해 비밀을 속삭이듯 털어놓곤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