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라는 직업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를 꼽는다면, 교육 활동으로 상상했던 거의 모든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점이다. 교육부에서 미리 정한 각 교과의 시수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초등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광범위한 것도 다양한 활동을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장점 덕분에 어떤 선생님은 교실에서 아이들이 세금을 내며 금융 지식을 익히는 교육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고, 또 다른 선생님은 성인지 교육을 학급 특색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가르치는 게 가능하다. 올해 우리 반의 학급 특색을 꼽으라면 ‘신체 활동’을 들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간단하게 계획했던 내용인데 지난달 교육청에 프로젝트 수업 예산을 신청하면서 구체적인 윤곽이 잡혔다. 머릿속에서 파편적으로 떠돌던 교육 내용들을 사업 지원서에 구체화시키면서 오래간만에 재미를 느꼈다. 물론 활동을 계획할 때보다 구상했던 것들이 교실에서 잘 실현될 때 더 즐겁고 신이 난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운동화 신은 뇌’이다. 1교시 전 아침 활동 시간과 스포츠클럽 활동 시간, 체육 시간 등을 활용해서 매일 신체 활동을 하는 게 목표다. 1차시 이상의 신체 활동을 진행하면서 최대…
이제 금요일부터 사전투표가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 사전투표는, 전국 단위 선거로는 2014년 제6회 지방선거 때 처음 적용됐었다. 사전 투표가 처음 실시됐을 당시, 사전투표를 가장 많이 한 세대는 19세와 20대였던 반면, 가장 저조한 사전투표율을 보였던 세대는 70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최종 세대별 투표율을 보면, 20대의 투표율은 끝에서 두 번째로 저조했지만, 70대 이상의 투표율은 60대 투표율 다음으로 높았다. 처음 실시된 제도였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젊은 세대들이 사전투표에 많이 참여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새롭게 도입된 제도에 대해 생소함이 있을 수 있었던 고연령층은 본 투표에 참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사전투표율은 점점 올라갔다. 젊은 세대부터 고령층까지 점점 사전투표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갔기 때문인데, 지난 21대 총선에서는 사전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세대가 60대와 70대였다는 점만 봐도 이런 추론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사전투표율이 높으면 최종 투표율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대 대선의 사전투표율은 26.1%였고, 최종 투표율은 77.2%였던 반면, 21
매일같이 난무하던 여론조사 결과를 지금은 공표하지 못한다. 후보들의 지지율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투표일 전 1주일 동안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거나 왜곡된 정보로 주권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차단하는 게 맞다. 답답하고 궁금하더라도 지금은 선관위가 보내준 공보물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때다. 서울신문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 25~26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각각 37.2%와 42.3%로 5.1% 차이였다. 갤럽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가정한 조사도 했는데, 그 결과 격차는 더 적었다. 단일화를 하면 0.1%라도 더 벌어져야지 줄어드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25일 TV 토론에서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는 결렬되었다고 재삼 확인한 마당에 이런 조사를 왜 한단 말인가? 그 답이 나왔다. 결국 안철수는 윤석열과 단일화에 합의하고 후보를 사퇴했다. 결렬 선언 이후에도 집요하게 단일화 조사를 한 이유가 있었다. 단일화 압박. 여론조사는 이렇게 부실할 뿐만 아니라 음흉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순
오랜 대화 뒤에는 대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상기해보라. 그러면 그 대화의 대부분이, 아니 때로는 전부가 참으로 공허라고 쓸데없고 종종 사악했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이미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사디) 네가 말을 할 때에는 그 말이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한다. (아라비아의 속담)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일이 한 번이라면, 침묵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일은 백 번이 될 것이다. 선량한 사람은 말다툼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말다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 선량하지 않다.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박식하지 않으며, 이른바 박식한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한 말은 종종 귀에 거슬리고, 귀에 듣기 좋은 말은 종종 진실하지 않다. (노자) 육체노동은 하찮은 잡담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유익하다. 현명해지고 싶으면 현명한 질문을 하고, 주의 깊게 들으며, 차분하게 대답하고, 그리고 할 말이 없을 때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다. (라파테르) 사람들이 오랫동안 논쟁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그들이 논쟁의 쟁점을 그들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것인가?' 마지막 연이다.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시는 "모든 일이 이렇지 않았던가?" 하고 비논리의 일상성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사회주의 체제였던 동독에서 1954년께 이런 시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민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성으로는 알 수 없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시인은 알고 있고, 보고 있다.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상상력일 터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불가지의 답답한 세상을 다른 세상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신화와 그 이후의 시와 소설 등 예술이 그런 매개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다. 다시 물어보자. 장미
에세이는 자유로운 문학이지만 자기 색깔이 분명해야 한다. 비록 평범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진실이 탑재되어야 힘을 얻는다. 수필적 사유의 깊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심도와 깊은 상관성을 갖는다. 동시에 독자에 대한 설득력으로 이어진다. 허풍 떨지 말고 겸허하게 수신에 힘써야 한다. 그런데 내가 성장해 오는 동안 학교 졸업식에서나 대학 학위수여식 때의 총장 축사에서 보면 거창한 말들이 많았다. ‘큰 꿈을 가져라’ 고 하거나 일류대학, 일류 사회, 선진국으로의 진입, 부강한 한국 등, 그것은 결국 경쟁으로 이어지고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상징하게 되었다. 따라서 학교에서나 기업에서나 연구기관에서나 수석이 되어야 하고 등수 안에 들어야 대접을 받았다. 그런 사람만이 행복한 것 같았다, 다수의 행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행복을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었고 배우지도 못했다. 행복에 대해서 선생님이나 부모로부터 배운 게 없다. 돈 때문에 한숨짓고 다투며 손발이 갈라진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돈이 있으면 좀 더 편하고 행복하겠구나. 하고 ‘돈 = 행복’을 막연하게 동경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학생은 공부 못하면 불행하고 어른은 가난하면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최근 발생한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제사회는 물론 우리 사회에도 많은 우려와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여러가지 영향중에서 과거 핵 보유국이었던 우크라이나가 미국 러시아 영국이 참여한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안보와 경제 지원을 보장받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핵문제 해결을 당면과제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기에 충분하다. 북한 핵문제는 지난 90년대부터 우리와 국제사회가 나서 해결한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해결이 어려운 주된 요인은 핵무기는 자위적 수단이고 군축차원에서 북한 핵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는 북한의 무리한 요구에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북한 요구의 강도가 약해지거나 변화할 것 같지 않아 보여 매우 우려스럽다. 북한 핵문제가 방치되면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안보 불안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북한이 우리를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는데 과도하게 문제삼아 북한의 반발을 초래하고 한반도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북한의 호전성을 외면하면서 북한 지도부의 합리적 판단과 선택에 대한 기대가 큰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북한이 잘못된 판단으로 이판사판식으로 핵무기를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어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의 준말인데요, 직역하면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듯이 해야 한다’쯤이 될 거예요. 살이 연해서 부서지기 쉬운 작은 생선을 요리할 때와 같이, 정사(政事)를 다루는 데도 차분하게 기다리며 세심하게 살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품고 있대요. 바야흐로 20대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네요. 워낙 ‘비호감 대선’이니, ‘막장 드라마’니 하는 악평이 지배한 선거전이어서 난생처음 보는 험궂은 장면들이 넘쳐나고 있지요. 국민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비전도 딱히 없고,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구호도 없어요. 시종일관 네거티브로 점철된 선거전이 유권자들의 시름만 깊어지게 만든다는 한탄이 나올 정도예요. 그래도, 사뭇 전개되는 팽팽한 진영 대결 구도만큼은 예나 마찬가지인 듯해요. 상대방의 약점만 골라 침소봉대하는 흠집 내기 일변도, 나라 살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우선 환심을 사고 보자는 식의 포퓰리즘 난무, 정치 수준을 높일 개혁 프로그램 경쟁의 실종 등을 특징으로 정리해도 될 것 같네요.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次惡)을 골라야 하는
神은 세상 모든 만물을 주관할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창조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꽃을 주었다. 꽃이라 이름 불러주기 전에는 몸짓에 불과했으나 알맞게 불러 줌으로써 무엇이 된다. 흔들리며 피는 꽃도 있고 이름을 불러줌으로 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생물학적 성(性)과 사회학적 성(性)으로 구분하면 젠더(gender), 섹스(sex)가 된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불러내고 응답함으로써 완전한 무엇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균형이 깨지면 갈등이 생기고 권력과 힘에 의한 폭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성은 꽃 인가?라고 물으면 남북한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말할 것이다. 남쪽사람은 ‘빵과 장미’ 아니면 다른 무엇일 것이다. 북쪽출신인 나는 노랫말 가사를 생각한다. 여자의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남쪽남자는 ‘너 나와 친구할래, 아니면 남자할래’고 물음으로써 자신이 남자임을 확인시킨다. 북쪽남자는 무엇이라고 할까. ‘너 나와 동무할래 아니면 오빠할래’고 하여 자신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근접시킨다. 연애하는 과정에도 오빠가 아니라 동무라고 하기도 한다. 동지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고 동무는 친구이다. 동지라는 말보다 동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동무에서 연인
‘비호감선거’라는 말 자주 듣는다. 영웅부재시대라는 말 떠올린다. 아버지 집을 누가 비싸게 사줬다네. 법카로 초밥 수십 인분을 한 번에 사먹었다네. 살아있는 소 가죽 벗기는 푸닥거리로 뭘 노렸지? 대장동 직접 사인한 서류가 왕창 나왔대. 검사 사위 덕 듬뿍 봤다네. 아들 퇴원에 관용차 썼다더군. 주식시세 조작해 돈 벌었다네... 이런 일들, 전에는 구렁이 담 넘듯, 흘러갔다. 모르는 척해야 현명하다 했다. 심지어 ‘순리(順理)’라고도 했다. 권력과 언론의 유착은 매우 정교해서 아직도 ‘파워 만땅’이라고들 한다. 민초(民草)들은 뭐지, 세금만 내는 루저? 개돼지? 지금도? 전에 영웅 또는 천사를 뽑았다면, 착각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을 뽑았던 과거 선거는 ‘호감선거’였나? 백성 입 닫아걸고 언론에는 아무 얘기도 못하게 하면, 그는 영웅이었다. 어릴 적, 내게 대통령 박정희는 천사였고, 잘생겼고, 정의 그 자체였다. 좀 지나 ‘사나이’ 전두환 일대기는 주먹 불끈 쥐게 하는 영웅담이었다. 이순신 장군보다 위대했다. 착각을 강요했다. 심지어 충무공과 지들을 겹쳐보이게 하는 시도도 벌였다. 장난도 심했지. 비밀 없는 세상, 영웅이 되거나 만드는 ‘작전’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