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궁극적 목표였다. 민비와 그 척족이 권력을 쥐고 농단하는 동안, 나라는 늘 풍전등화였고,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싸우던 외세(청나라와 일본)는 그 존재자체가 생존의 위협이었다. 전봉준은 그 일체의 학정과 위협을 사즉생과 임전무퇴의 정신으로써 대항해야 할 폭력으로 인식했다.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동기다. 그 폭력을 제거해야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백성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돕는 일이며, 그 때 비로소 씨알들의 삶이 편안해진다는 것이 동학군의 신념이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고부에서 시작하여 전주까지 파죽지세로 달려갔다. 관군에게 압승을 거둔 농민군은 혁명전사로 변했다. 그 마음으로 우금치까지 폭풍 진격했다.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겨우 200명의 일본군과 3000명의 관군이 연합하여 2만명의 동학군을 전멸한 것이다. 대포와 최신형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에게 화승총과 죽창으로 대항한 '아군'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130년 전, 그 조상들이 당했던 폭력은 치명적이었다. 안팎으로, 무능하고 악마적인 왕조와 외세(청나라와 일본)는 잔인무도한 폭력집단이었다.…
새 대통령은 통일의 기초를 확실히 놓을 수 있는 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 커서인지 낙심이 너무 크다. 새해 들어 점점 농도를 더해가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접하며, ‘선제타격’을 주장하는 후보, 점잖게 타이르며 핵미사일을 내려놓으면 내가 좋은 것 주겠다고 훈시 하는 후보, 평화번영정책을 계승 하겠다 면서도 현 남북관계 정체의 원인 진단이나 창의적인 대안 제시는 없이 그저 득표만을 의식한 듯, 북의 행태를 그저 도발로 치부하며 강경 발언을 내뱉는 후보 등 도대체 우리의 후손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할 한반도 미래에 대한 밝고 희망찬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포함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추진되어야 할 과제는 안정적인 남북관계의 발전이다. 혹시라도 남북간 군사적 충돌 상황이 벌어진다면 한반도 리스크가 고조되고, 해외자본 유출은 물론, 생산활동과 수출이 감소하여 실업과 물가의 상승 등 재난수준의 악몽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 확실함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새롭게 탄생하는 정부에서 꼭 유념해 주었으면 하는 대북정책…
한국의 20대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무력화한 이른바 윤석열 사태 정국이 아닌가 한다. 당시 검찰의 선택적 수사에 분노한 시민들은 대규모 촛불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0대는 생뚱맞게도 공정을 외쳤다. 조국 씨 부부의 자녀 스펙 쌓기야말로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증표라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기성 언론이 정권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우리 사회의 낯선 언어인 공정을 내세웠는데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 격으로 예기치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아무튼 20대가 부르짖은 공정은 한국 사회의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공정이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어 20대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는 이즈음이다. 하지만 이는 20대의 출현 그 서막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공정 사건' 이후부터 그들이 선거의 가장 큰 변수로 자리 잡아 기성세대의 판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대 대선 후보 지지율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20대 존재감으로 정리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헤럴드경제 의뢰로 지난 2~3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20대의 국민의힘당 윤석열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53.7%로 과반을 넘었다. 리서치뷰가
레퀴엠(Requiem).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그래서일까. 무섭고 장중하고 근엄하다. 하지만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레퀴엠은 전혀 다르다. 지옥불처럼 요동을 치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아주 상냥하고 평화롭다. 죽음은 결코 황망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 이것이 포레의 철학이다. 그의 파반느(Pavane) 역시 너무도 아름답다. 피아노 선율과 트럼펫 소리는 우리의 심연을 오묘하게 파고들어 흔든다. 독일풍이 아닌 프랑스풍을 구가했던 포레. 키는 작았지만 뚝심의 사나이였다. 그의 고집은 프랑스 음악을 바그너 음악으로부터 탈피시켰다. 그가 격찬 받는 이유 중 하나다. 포레는 베를리오즈 시대가 가고 드뷔시의 시대가 오기 전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가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은 건 아니다.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유명하게 되자 비평가들은 흔들어댔다. 그러나 포레를 괴롭힌 건 혹평이 아니라 신체적 장애였다. 귀머거리 작곡가하면 베토벤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포레 역시 그러했다. 선율을 들을 수 없다면 작곡가의 인생은 끝난 게 아닌가. 하지만 역경 속에서 더 찬란했던 사람들이 있다. 포레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청각을 잃으면서부터…
영혼에 있어서의 선은 육체에 있어서의 건강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진실로 몸에 배어 있을 때 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진실로 선한 사람은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 선한 사람인 것이다. 스스로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선행을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짜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선행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자기 이름도 알리지 않는다. 반면 거짓된 선행은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이름을 알린다. 진정한 공정함은 필요한 경우에만 얼굴을 내놓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거짓된 공정함은 늘 참견하고 나서기를 좋아한다. 진정한 예의는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만 특별히 자기를 과시하고,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폭력을 써서라도 자신의 규칙을 지키게 한다. 바른 도리가 쇠퇴하고 인의가 사라지면 예의가 나타난다. 그 예의의 법칙은 정의의 모조품이며 모든 무질서의 시초에 불과하다. (노자)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끝까지 저 똑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애쓴다. 길을 반쯤 가다가 기운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중국 금언) 남몰래 선행을 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그때 비로소 너는 선행을 하는
어떠한 이치도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에 귀속시킬 수는 없으며, 정신의 탄생을 물질로 설명할 수도 없다. 영혼의 실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일에 열중하여 자유와 정의와 사랑 같은 정신적인 것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이성의 빛으로부터 몸을 피한다. 왜냐하면 그는 죽은 사람으로, 빛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생명을 주며, 반대로 죽은 사람이 빛을 받으면 마르고 썩기만 하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다르게 변화시킨다. 영적 생명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주의를 돌려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점검하려고 애쓰며, 자신의 생활을 고결한 영적 요구에 합당하도록, 즉 자유롭고 올바르고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노력하고, 실천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선의 여러 목적에 가장 합당한 사상과 감정으로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사람은 진실을 찾아 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왜냐하면 영적 생활은, 눈에 보이는 외계의 생활이 태양의 빛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이성의 빛이 없이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카) 형이상학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학문으로는 아닐지라도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던진 ‘선제타격론’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배치’ 공약이 논란을 빚고 있네요. 윤 후보의 입에서 ‘선제타격’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민주당이 발끈하는군요. ‘전쟁광’이라는 과격한 말까지 나왔어요. 사실 ‘선제타격론’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공격 징후가 현저할 경우”를 상정한 질문에 대한 즉석 답변인데, ‘억까’식 비난은 좀 과하다는 느낌이 있네요. 그런데 지난 3일 TV 토론회에서 윤 후보가 한 ‘사드 추가배치’ 발언은 엉성하기 짝이 없어요. 북한의 핵미사일로부터 수도권 방어를 위해서 다양한 요격미사일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얘기라면 비난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하필이면 비판과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드’를 수도권 주변에 배치하겠다니 벌집을 건드린 셈이 되고 말았군요. 문득 윤 후보 참모들의 수준을 의심케 되네요. 군사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우선 ‘선제타격론’은 북한군의 ‘발사징후’를 포착하기가 어렵다는 차원에서 미더운 대안이 못 된다고 해요.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정치적 허세나 꾐수는 될지언정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라는 얘기죠. 윤 후보의 ‘사드 추가배치’ 공약도 그래요. 실효성은 물론이고 선거전략 상으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가 쏟아지고 있지만, 누가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역대 대선을 보면 대선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유력 후보들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는 현상은 있었어도, 이번 대선처럼 1위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된 이유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거대 정당의 후보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 창출에 실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 대선에서는 유력 후보들이 거시적인 이미지를 창출했었다.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샐러리맨 신화를 내세워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들었었고,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연관된 이미지를 창출했었다. 19대 대선의 경우 탄핵 때문에 급하게 치러진 대선이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 창출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통상적 상황에서 치러지는 선거이기 때문에 후보의 이미지 창출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두 후보 모두 이런 이미지 창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거시적 슬로
초등학교 생활에서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학업보다는 친구 관계가 더 크다.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하는 친구들이 많지만 초등학교는 친구와 사이가 좋으면 만사형통인 아이들이 많다. 학부모 상담을 했을 때 부모님의 걱정도 교우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에게 친구가 없으면 아이 본인도, 부모님도 걱정이 크다. 인간관계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게 아니기에 친구 사귀는 법이라는 정답이 있는 메뉴얼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분명히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방법들은 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걸 어려워하는 소극적인 아이들에게 상담에서 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아이는 상담 후에 정말 친구를 사귀는 데 성공했고, 또 다른 아이는 노력했지만 끝내 혼자인 채로 다음 학년에 올라갔다. 아이 노력과 부모님의 관심 및 협조가 함께 어우러진다면 성공 확률이 더 높다. 교우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첫 번째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글자만 놓고 보면 얼핏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아니다. 대체로 아이들은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고, 사랑받을만한 사람인지 확신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절대자의 섭리에 순응해야겠지 싶다. 운명이란 두 글자가 품고 있는 그 의미 속으로 푹 빠져들어 허둥대다 끝나는 것이 인생인가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내며 버스비를 아끼겠다고 온몸으로 걸었다. 기초적인 생활경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때때로 하늘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지족자선경(知足者仙境)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살았다. 매사에 족한 줄 알고 나와의 인연에 감사하며 상대를 배려하고자 했다. 따라서 창조적인 자신의 빛과 스타일을 위해 나 자신답게 살고자 했다. 그런데 진(眞)과 선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때 영혼이 감전되어 죽어 가는가 싶기도 했다. 몇 년 전 이청준의 산문집에서 『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라는 글을 읽었다. 내용은 이렇다. 한국전쟁의 어느 해 겨울, 외국 선교사가 눈 덮인 시골길 다릿목을 지나가는데 교각 아래에서 웬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내려가 보니 한 남루한 여인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어있는데 그의 품속에는 갓 태어난 여자아이가 아직 살아 울어대고 있었다. 심한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도 아이가 살아남은 것은 그 엄마가 자신의 옷을 벗어 아이를 꼭꼭 감싸 안고 죽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