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회 임성환 의원 두 팔을 지지대 삼아 두발을 위로 올려 가위질 하듯 앞뒤로 가로젓는다. 머리를 꼭지점 삼아 발을 돌리는 것을 시동으로 온몸을 따라돌린다. 흡사 팽이 인간이다. 부천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종종 접했던 춤, 브레이킹(브레이크댄스)이 2024년 파리 올림픽에 정식 초청장을 받았다. '브레이킹'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이다.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나들며, 기록에 도전하는 종목들이 즐비한 올림픽에서 ‘브레이킹’이라는 종목을 받아들인 것은 가히 혁신적이다. 우리나라 춤사위 고수들도 관심과 이목을 집중, 올림픽 무대에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브레이킹’은 1970년대 초 미국 뉴욕 길거리에서 소년들이 추던 춤이다. 자메이카 출신의 디스크자키(DJ)이자 힙합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쿨허크(Kool DJ Herc)가 음반을 틀어 돌릴 때 간주, 즉 브레이크 부분에 멈춤과 일정구간에 도돌이표를 가하는 새로운 음악장르(?)를 연출했다. 비트에 몸을 맞춰 리듬을 타며 춤추는 것을 ‘브레이킹’이라 했으며, 춤추는 사람을 브레이크 보이(break boy)를 줄여 남자는 비보이(b-boy), 여자는 비걸(b-girl)이라고 불렀다. ‘브레이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이 말을 정치비평에 적용하면 이렇다. 정치평론가들은 숱하게 정치판을 분석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눈꼽만큼도 그러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종편과 유튜버 등 온갖 미디어에서 난무하는 정치비평이 요즘엔 약보다 독이다. 대다수가 윤석렬이 해임에 버금가는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틀렸다. 추미애는 사퇴하지 않을 것이며 혹은 대통령이 사의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틀렸다. 죄 틀린다. 그때마다 대중들이 갖게 되는 실망과 좌절감이 얼마 만한 것인지 그들이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내 대중들은 한때 개돼지 취급을 받은 적이 있어, 상당히 똑똑해졌다. 그런 만큼 꽤나 흔들리기도 잘한다. 대중들은 더 이상의 분석보다는 행동의 지침을 요구한다. 행동하는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이 종종 고전을 찾듯이 정치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어땠는지를 보면 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지금의 사회 개혁이 행동주의적 측면에서 당시의 사회주의 혁명의 단초를 모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는 더 이상
2020년 12월! 마지막 달력한장이 벽에 걸려있다. 1월의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한 해가 며칠 남아있지 않다. 어렸을적 기억을 회상해보면 한 학기가 지나는 것은 왜 그렇게 길었는지, 반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시작된 듯, 어느 사이 개학이 목전에 와있다. 어느 순간 필자의 시간은 어릴 적 방학처럼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 빨라진 시간속 올 한해도 다사다난(多事多難)은 어김없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암울한 소식이 연초부터 문화체육관광분야 전분야를 휩쓸며 엄습했다. 각종 공연이 취소 또는 연기되면서 공연예술인의 생계가 위협받고, 신진작가 미술품의 오프라인 전시판매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공연과 전시 등 예술활동이 위축되자 문화예술 생태계는 위협받았으며, 문화예술교육사업의 대면교육은 한계에 봉착했다. 체육활동은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가고, 경기는 무관중으로 치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로 발목잡힌 경기도 문화체육관광의 위기에서 벗어나기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직 힘이 부친다.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해, 경기도 문화체육관광국과 그 산하공공기관과 협업하여 ‘경기도형 문화뉴딜 프로젝트’로 극약처방도 했다. 경기문화재단은 위기 예술인을 대상으로 ‘백만원의 기적’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민주주의적 대응 모델은 미국의 자유방임적 모델, 중국의 전체주의적 모델, 일본의 관료주의적 모델, 그 어느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친인간적인 방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아직 너무 어리다고 평가한다. 70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수많은 굴곡을 겪어 제도적으로는 완비했지만 정당 민주주의도, 책임정치도, 정책선거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시민의식은 성숙한 민주주의라 일컬어지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행태보다 훨씬 더 훌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휘하는 시민의식의 근간은 무엇일까? 아마도 불편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마스크를 쓰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사회경제적 영역에서만큼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우리 모두를 위해 ‘동참’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지만 이러한 마인드는 후보자를 평가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선거과정을 제외한 일상적인 정치영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엄마 어디 가?” 자반고등어를 구워놓고 검찰청 앞으로 뛰어간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의아하게 묻는 아들은 항해사다. 코로나로 인해 일 년가량 배에서 내리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2주 동안 자가격리 생활하더니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휴가 기간이라도 아들과 밥 먹으려는 계획이 어긋났다. 슬며시 짜증이 올라온다. 촛불정부가 들어섰어도 또 일인시위다. 대한민국 국민 노릇 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 ‘이제는 불의한 꼴을 더는 안 보겠구나’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 ‘불의한 꼴’의 대부분은 법을 집행하는 검찰의 소행이었다. 검찰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일제강점기에서 현재까지 검찰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다. 항일독립군에서 민족주의자, 학생, 야당 인사, 진보단체 등 시기에 따라 사냥감만 바꾸어 권력에 충성했다. 간첩 조작은 물론 유서 대필로 몰아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기도 했다. 편파 수사와 여론몰이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악행도 똑똑히 보았다. 그런 검찰이 제 식구 감싸기에는 철저했다. 김학의 동영상에 맹인행세까지 하던 코미디도 기억한다. 그들의 정
코로나19는 시민들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시민들의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대면접촉을 최소화하는 패러다임으로 삶의 틀이 급변하고 말았다. 비접촉(언택트)이 새로운 일상(뉴노멀)이 되었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으로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음식 배달서비스가 외식을 대체하게 된다. 음식 배달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은 압도적 다수가 주문배달 대행서비스, 약칭 ‘배달앱’을 이용한다. 수도권공정경제협의체가 지난 6월부터 7월까지 수도권 외식배달 음식점 점주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배달앱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비자의 96%가 배달앱을 이용해 주문을 하고 있다. 배달에 응하는 음식점들도 평균 1.4개의 배달앱에 가맹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렇게 주문과 배달의 길목을 외국자본인 독일회사가 ‘사실상 독점’한 배달앱이 음식점과 시민들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잘 연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상기 조사에서 배달 음식점 10곳 중 8곳은 배달앱 업체의 광고비와 수수료가 과도하게 높아 부담이 된다고 응답했다. 이 때문에 음식 가격을 인상하거나 고객들에게 배달료를 부담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민간 배달앱 이용 시 발생하는 가맹점 수수료도
블랙머니와 검사의 두 얼굴 “블랙머니”. 검은 돈, 뇌물이나 부정한 거래에 은밀하게 오가는 돈이라는 뜻인데, 은행매각 비리, 금융 범죄를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의 소재는 외국계 사모펀드가 은행을 헐값에 매입하고, 매각한 사건을 파헤치는 검사 이야기. 영화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한 수사 검사가 수사 중지라는 윗선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증거자료를 폭로한다. 그런데 부장검사와 사건 배후에 있는 핵심 인물인 전직 총리가 사건 실체의 은폐를 은밀히 합의하는 데, 더 눈길을 끈 것은 검사 사무실 벽면에 걸린 액자였다. 이 액자에는 “공명정대(公明正大)”라는 네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공명정대한 길을 걸어 왔는가 현실은 영화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내외부적 압력에 따른 사건 무마 등 사회적 사건을 그저 영화 속의 픽션으로만 볼 수 없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중심에서 검찰이 처한 현실이다. 그간 검찰이 가진 권한을 정당하게 행사해 왔는지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건들만 해도 수도 없다. 정치적 과잉 수사를 한다든지, 기소할 혐의자를 불기소 처분한다든지, 제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지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검사선서”(대통령령 제21344호)의 핵심내용이다. 소리 내서 읽다 보면 없는 존경심도 싹튼다. 국민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명예까지 걸겠다는 대목에서는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소방관 같다고나 할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선언문에 적힌 다짐을 흔들림 없이 실천해내는 검찰의 모습이다. 놀랍고 존경스럽다. 1.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찰 임은정 검사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2012년 반공법 재심과 민청학련 재심사건에서 검찰 수뇌부의 지침을 무시하고 무죄를 구형했다.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찰’이 등장했다. 검찰은 무죄를 구형한 임은정 검사에게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검사로서 체면과 위신을 손상했다는 게…
검찰개혁은 국민주권의 문제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검·경수사권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의 검찰개혁이 방향을 잃었다. 벼랑 끝에 몰린 검찰개혁을 갈망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시리즈로 싣는다. [편집자 주] '추윤 갈등'은 기성 언론과 국민의힘당 등이 만들어낸 잘못된 말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항명'이라고 써야 쓰임새가 정확하다. '검사들 집단행동'은 좀 나은 편이지만 이것도 앞에 수식어 하나를 붙여야 맞다. '검사들의 불법적 집단행동'이라고. 촛불 정부 들어 수구 세력들(그들이 어찌 보수란 말인가? '보수'도 잘못 사용되고 있는 말 중 하나다.)의 우리말 비틀기가 일상이 되었다. 그들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말들에 박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정반대로 읽어야 어떤 진실에 다다른다. 심지어는 문장 비틀기도 다반사여서 약간의 논리적 사고를 요한다. 그중 눈에 띄는 건 윤총장의 항명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어가고 있을 무렵 기성 언론에 보도된 문장 하나. "대통령이 나서서 추윤 갈등을 빨리 해결하고 민생에 나서라." 이 문장은 그럴듯하다. 민생 앞에서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국민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절실한 것이 어디에 있
검찰개혁은 국민주권의 문제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검·경수사권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의 검찰개혁이 방향을 잃었다. 벼랑 끝에 몰린 검찰개혁을 갈망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시리즈로 싣는다. [편집자 주] 다 아는 이야기다. 스핑크스는 지나는 이들에게 문제를 내고 풀지 못하면 죽였다. 뭐 이런 살벌한 퀴즈 출제가 다 있나. 그 앞에서 살아난 사람이 없게 되었는데 오이디푸스가 해답을 내놓자 이번에는 스핑크스가 충격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라? 여직 이걸 맞춘 놈이 없었는데” 하고 기가 탁 막혔을 거다. 상대의 운명을 거머쥘 권세가 그 순간 사라진 것이다. 아침에는 네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 이게 뭐지? “사람”, 하고 오이디푸스가 명확하게 말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인간의 운명이 어찌 달라지는지 꿰뚫어본 자에게 스핑크스가 맥을 추지 못했다. 어떤 역사도 처음에는 아장걸음을 걷다가 승승장구하는 날을 지나 어느 날 쇠퇴하면서 다른 시대에게 길을 비켜야 한다. 앙시앙 레짐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출현하기 마련이다. 운명조차 거부하지 못하는 필연이다. 따지고 보면 네 발로 기어 다닐 때 두 발로 걷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 두 발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