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의 메타버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줄거리는 이렇다. 영화 속 대부분의 사람들은 VR 기계를 끼고 특정 게임에 로그인해서 하루를 살아간다. 게임 속에서 아이템을 채굴해서 판매하거나 대여하는 걸로 현실 수입을 얻는다. 평범하게 살던 주인공은 게임 회사가 내건 퀘스트에 도전하며 갖은 위험에 처한다. 결말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이 모든 퀘스트를 완료하고 악당이 물러나면서 가상공간 세계의 평화를 되찾는다는 다소 뻔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가 뻔한 것과 별개로 메타버스를 주된 소재로 삼은 영화라서 무척 흥미로웠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뜻하는 '메타'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의 합성이다. 언제부턴가 자주 보이는 단어지만 생각보다 훨씬 예전부터 생활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다.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는 메타버스 분류 중 라이프로깅(lifelogging) 분야의 대표적인 플랫폼들이다. 또, 인터넷에 접속해서 타인과 함께 하는 게임은 모두 가상 현실의 한 모습이다.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게임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태초에 리니지와 바람의 나라 같은 고전 명작들과…
한 20여 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다니던 회사 대표를 대신하여 벤처기업인들 모임에 과장이었던 내가 대신 참석했었다. 그 모임에 내 친구가 한명 있었다. 나를 발견한 친구가 다가와서 내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어이, 고 박사 반갑다.” 친구의 인사를 받은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어이, 그래. 반갑다.” 그러자 그 모임에 오신 분들이 나를 고박사라고 부르면서 인사를 청해왔다. 그 분들의 명함에는 대부분 박사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제야 나는 ‘어, 이게 아닌데?’ 생각했다. 내 명함에는 어디에도 박사라는 표기는 없었다. 사실 그때 나는 박사는커녕 학사도 되지못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제적돼서 졸업을 못한 상태였다. 어색한 인사가 이어졌고 어색한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그날 그렇게 졸지에 박사가 돼버렸다. 그러나 나의 박사사칭 행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나는 박사들과는 노는 물이 달라서 그들만의 리그에 끼일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데 그것은 내가 사기 친 것은 아니다. 대학 다닐 때 내 별명이 ‘고 박사’였다. 내가 스스로 주장해서 생긴 별명이 결코 아니었다. 친구들이 나에게 부쳐준 별명이었다. 증언해줄 친구들도 많이 있
언론학자와 저널리스트들은 진실보도를 강조하면서 객관보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뉴스의 취사선택 등 취재보도의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든다. 객관보도를 부정하면서 관점이나 다양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진실은 보편적이어서 주관이 개입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인간의 주관적 의식에서 독립되어 있는 객관의 영역에 있다는 뜻이다. 불가피하게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객관보도가 불가능하다면 객관의 영역에 있는 진실을 무슨 방법으로 확인해서 보도할까? 이것도 불가능하지 않나? 객관성이라는 것은 저널리즘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철학에서 실재론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학문이라는 게 진리를 추구하는 건데, 진리 인식이 불가능하다면 학문 자체가 성립할 수도 없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모태로서 학문 활동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러셀은 “모든 진리는 보편자를 내포하며, 참된 모든 인식은 보편자들과의 직접 대면을 수반한다.” 라고 했다. 감각의 영역에 있는 것들을 개별자라 하고, 개별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것을 보편자라 한다. 이 보편자가 바로 객관적 실재요 진실이 된다. 객관적 실재는
스페인의 코르도바(Cordoba)와 톨레도(Toledo)는 고색창연한 도시다. 중세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이미 고전(古典)인데, 파리대학이 유럽 중세의 지적 탁월함을 이루기 전에는 바로 이 두 도시가 쌓아올린 학문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랍어로 쓰여진 그리스 철학과 과학은 훗날 르네상스의 젖줄이 된다. 12~13세기 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새삼 발견하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걸까? 8세기 이후 15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의 영역이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접한 지중해를 거쳐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은 한때 로마제국의 판도였으나 제국의 몰락으로 이슬람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도권은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기독교, 유대교를 핍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면서 배워나가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 코르도바와 톨레도의 잔해 하지만 이슬람을 축출한 15세기 스페인은 잔혹한 국가로 변모했다. 종교재판은 세비야를 중심으로 광기처럼 번져나갔는데 이 징벌로 적지 않은 이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산채로 불태워져 죽어갔다. 사상과 신념은 통제되었고 공존
인생의 목적을 정신적 완성에 두는 사람은 어떠한 외적 사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자다움은 오직 용맹함 속에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남자다움은 분노를 이기고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를 사랑하는 데 있다. (페르시아의 격언)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 옳은 것을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공자) 어떠한 불행도 그것에 대한 공포보다 무섭지 않다. (호케) 만일 무언가가 두렵거든 네 두려움의 원인이 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있음을 알라. 강자란 것은 제 살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떠나 저란 것이 없는데, 제 생각만 하기 때문에 생명의 부드러운 기운이 거기 가지 않습니다. 강하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의 벌인데 사랑의 진리를 무시한 마음은 그건 줄은 모르고 그것을 점점 더 잘난 것으로 알고 더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강자는 반드시 망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은 부드러운 씨ᄋᆞᆯ이 됩니다.
지구환경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기후 온난화 및 대기와 수질오염의 심각성이 이슈화되면서, 공동재(common goods), 공공재(Public goods)와 함께 커먼즈(commons)라는 용어가 주목받고 있다. 커먼즈는 일반적으로 ‘공동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이나 지식을 포함한 공동의 ‘유·무형 재화’에 대한 권리를 일컫다. 커먼즈의 기원은 1225년 수정된 영국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에서 출발한다. 당시 ‘산림헌장’에서 목초지와 숲에 대한 평민(commoners)들의 사용 권리를 명시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경쟁적 자본주의 체제는 합리적 이기주의를 빌미로 천연공동자원을 독점하였고 한정된 공유자원은 급감하고 파괴되었다. 1960년대 일부 사회 활동가와 과학자를 중심으로 천연자원 고갈과 인구증가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자연 공동재의 사회적·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68년 생물학자 개릿 하딘은 “어민이든 농민이든 자신의 개인적인 자원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커먼즈를 소비하기 때문에 커먼즈는 지속될 수 없다.”는 내용의 「공유지의 비극」을 발표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
‘기레기’란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다. 당연히 기자들을 경멸하는 모욕적인 표현이다. 위키백과에서는 “허위 사실과 과장된 부풀린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이나 현상”을 지칭하는 말로 규정한다. 얼마 전 대법원은 ‘기레기’란 말을 들을만한 기사를 쓴 기자에게 ‘기레기’라고 하는 것은 모욕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기레기’라는 말은 2010년 무렵 MB정권이 언론을 장악한 이후 등장했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보도 이후다. 과거에도 사이비기자, 악덕기자, 어용기자와 같이 기자직을 비하하는 말은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기자라는 직업이 본래 그런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미 100년이 훌쩍 넘은 한국 언론의 역사는 한마디로 ‘영혼이 있는’ 기자가 반복적으로 추방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지사(선비) 언론인과 식민지시절 민족주의 계열 기자들은 일제가 축출했다. 해방 직후 남한을 접수한 미군정은 40여 곳의 좌익계열의 언론사와 수많은 ‘반미’ 언론인을 ‘대학살’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진보계열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를 처형했고, 10월 유신
인간이 만약 사후에도 자신의 생명이 불멸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병은 오직 하나의 생활에서 다른 생활로 옮겨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병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가올 새로운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우리는 보통 신에게 봉사하고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려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예수가 신과 인류에 최대의 봉사를 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자기를 죽이려 한 사람들을 용서한 그 순간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그것이 가능하다. 잘못된 의술은 환자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만 목적으로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피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뿌리치게 한다. 이는 그들로부터 도덕적인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접근을 그의 눈에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자신 속의 결코 나약해지지도 죽지도 않고 항상 성장을 멈추지 않는 신의 자녀로서의 본질을 의식하게 하는…
무심히 따라 불렀던 노래의 본뜻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라 쿠카라차가 대표적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데다 방송을 많이 타서 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후략) 라 쿠카라차(La cucaracha)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뜻. 원뜻을 붙여 보면 ‘바퀴벌레 바퀴벌레 아름다운 그 얼굴’ 이렇게 부른 셈이니 황당하고 우습다. 그러나 ‘바퀴벌레’가 가사 속에 들어간 사연을 알고 나면 웃음은 쏙 들어간다. 사연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격동의 과거사를 가진 멕시코를 알아야 이해된다. 마야문명과 아즈텍, 찬란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멕시코는 1521년, 스페인에 정복 당하면서 300년간 식민통치 받는 굴욕을 겪는다. (라 쿠카라차는 원래 스페인 민요로 스페인 상륙과 함께 전래되었다.) 1821년, 독립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져 영토를 대거 빼앗기고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는가 하면 외국자본, 대지주와 결탁한 부패한 정부에 의해 노동자, 농민의 삶이 파탄지
예전에 있었던 학폭사건으로 연예계나 체육계가 뜨겁다. 지금도 초·중·고의 어두운 곳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학폭을 당한 아이나 부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한다. 내 친구의 경우는 아들이 따돌림을 당해 학교를 찾아가니 선생님이 비협조적이었고 교육위원에다 진정서를 보내보라고 했단다. 문제는 상대 학부모를 찾아가도 자기 자식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자식 편만을 든다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들은 말로는 피해 학생이 병원에 입원해서 가해자 아버지가 입원한 학생을 찾아갔더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한다. 그 아버지는 공부도 잘했던 자신의 딸이지만 마주하면 그 애가 생각나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고 하였다. 학폭은 정말 잔인하고 무섭다. 언젠가는 놀이터에 있는 아이까지 납치해 죽이게 한 사건도 있었다. 어른인 나도 브레이크 없이 날뛰는 망아지 같은 아이를 타이를 수 있을까 의문이다.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들까 옛날같이 선생님을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선생님도 체벌이 금지됨은 물론 부모들의 간섭으로 학생을 정성껏 지도하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려고만 할 것이다. 훈육은 부모도 한몫이 되어야 할 것인데 자식의 기를 꺾을 수 없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