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지척에 있어도 오갈 수 없으니 지구의 반대편보다 더 멀리 있는 듯하다. 때로는 미움에 온 몸을 불사르다가도 때로는 술 한 잔에 목메는 날도 있다. 아니 생각하려 해도 기억을 소환하지 않고서는 나도 모르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 취중에라도 목 놓아 불러보고 싶은 것이 고향이다. 술이라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떠올린다. 세상살이 어려워 숫 덩이 같은 마음이라도 술 한 잔으로 해독할 수 있다며 이유를 붙여가시면서 드신다. 어떤 술을 마실가. 대부분 누룩을 발효시켜서 만든 증류이다. 알코올을 얻으려면 먼저 누룩이라는 곰팡이 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화학공장에서 나온다. 시장에 나온 것을 사다가 재료(가루)와 섞어 놓으면 곰팡이 균이 자라고 두 번째로 독에 넣고 보름 정도 지나면 술 익는 소리가 엄청 요란스럽다. 뚜껑을 열어 향긋한 냄새가 나면 잘 익은 것이고 시큼한 냄새가 나면 술도 시어져 버린다.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해 오르는 증기를 냉각시키면 관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술이다. 여기에 세신 뿌리나 오미자를 넣으면 정품보다도 더 맛있는 향기로운 술이 된다. 이 것을 서민들이 먹는 농태기(소주)라고 한다. 식량이 귀한 때일수록 술에 대한 수요가 더욱 높
앞서 인용한 매클루언의 말을 다시 상기해보자. “기계시대 동안 우리는 우리 몸을 공간적으로 확장해왔다. 전기 테크놀로지가 등장한 지 1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 우리는 우리 행성에 관한 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폐지하면서 우리의 중추신경체계 자체를 지구를 품을 정도로 확장해왔다.” 매클루언에게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 대표 저서인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인간의 확장’이다. 미디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는 얘기다. 신체의 확장, 그중에서도 중추신경의 확장이다. 의사소통의 매개체라는 정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매클루언에게는 옷과 집도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바깥 온도가 낮으면 몸 안의 열이 밖으로 이동해 추워진다. 특히 35도 이하가 되면 위험해진다. 이때 옷은 체온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피부의 역할을 한다.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의 더운 지역에서 지낼 때 털을 포기하게 된 후, 유럽의 추운 지역으로 이동해서는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후 사계절의 변화가 있는 지역에 상주하면서 사는 동안 진화에 의해 지금과 같은 피부를 갖게 되었다. 더울 때는 가볍고 통풍이 잘되는
“한자를 쓰려면 확인을 해야지...” 지적하니 그는 의아한 표정이다. 저널리즘 글쓰기 강의에 제출한 리포트, ‘...여론(與論)을 무시하면 안 된다.’라고 쓴 것을 ‘輿論’으로 고쳐야 한다고 얘기해주니 그 학생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한참 보더니 “아, 글자가 좀 다르군요.” 한다. “그래도 발음은 같으니 그냥 쓰면 안 되나요?” 반문한다. 알아들으면 되지 않느냐는 항변인 셈이다. 여론 ‘여’의 한자는 수레 輿다. 차(車) 즉 바퀴 여럿인 수레를 여러 사람이 움직인다고 하여 ‘여럿’ ‘다수’의 뜻이 됐다고 푼다. 여럿이서 뭔가를 들어 올리는 그림글자 舁(여) 안에 車가 들어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여론이다. 조선시대 김정호의 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輿이기도 하다. 수레(輿)처럼 만물을 실은 땅(地)이 여지(輿地)다. 이 말은 대지(大地)나 천지(天地)의 은유적 표현이다. 모양 비슷해도 ‘그냥 쓰면’ 안 되는 이유다. 그 리포트의 與자는 ‘주다, 패거리, 따르다, 편들다’ 등의 뜻이다. 이 與論은 사전에 없다. 굳이 해석하자면 ‘(누구를) 편들거나 따르는 의견’이다. 여건(與件)이 ‘주어진 조건’ 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까? 조작 여론인 것이다.
이웃에 대한 물질적 도움보다 그를 정신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진정한 자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 지지는 그의 인간 존엄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잘 먹고 잘 입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면, 초라한 집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 가난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라. (성현) 너희가 자신에게 남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을 자비로운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사랑은 거기서 더 나가 너희의 마음속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현) 비방과 험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다. 올바른 재판관은 자신의 이웃을 심판하는 것과 똑같이 자기 자신도 심판하는 것이 마땅하다.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미망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너그러운 사랑으로, 그가 올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 길을 잃은 나그네가 우리를 찾아오면, 우리는 그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가? 환자에게 화를 내는 의사가 어디 있겠는가? (세네카) 바르게 살라, 화를 내지 말라. 요구하는 자에게는 주어라. 그는 너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6일 개청을 앞둔 수원시 팔달구 지동행정복지센터에서 지난 1일 관계 공무원과 인권영향평가협의회, 장애인 단체 등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입주를 앞둔 사전 점검이 열렸다. 수원시는 지동행정복지센터를 수원시 최초의 ‘인권청사’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장애인, 노인, 영·유아 부모, 다문화 가족 등 지역주민들이 편리하게 공공청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사람 중심 행정’을 펼치고 있다는 수원시의 설명대로 눈길, 손길, 발길 닿는 곳마다 ‘인권’을 고민한 흔적들이 보인다. 지동행정복지센터 신축사업은 지난 2017년부터 시작됐다. 시가 이 건물을 첫 번째 인권청사로 건축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타 지역에 비해 지동의 주거 환경이 낙후돼 있는 데다, 노인이나 외국인 등 취약계층이 많고, 사회기반시설 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구의 21%가 노인이고, 외국인도 10%나 된다. 건축물도 노후화돼 1960~1970년대에 지은 집이나 상가가 60%다. 행정복지센터도 마찬가지로 30년이 넘은 데다 공간도 매우 협소해 주민과 직원 모두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특히 노인과 장애인, 외국인에 대한 배려도 미약했다. 수원시청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2016년 수원
노동자는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뜻이다. 노동자를 구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흔히 말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고용형태에 따른 구분이다. 기간의 정함이 없는, 즉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계약이면 정규직이다. 반대로 비정규직은 기간이 정해진, 그 기간이 끝나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노동자다. 단시간 근로자라는 개념도 있다. 주위 다른 노동자에 비해 근무시간이 짧은 이들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근로시간이 짧은 노동자 중 1주일에 15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사람을 별도로 구분하여 초단시간 근로자라고 부른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이, 평균 근로시간 노동자에 비해 단시간 노동자가 그리고 다시 초단시간 노동자가 더욱 열악한 경제 상황에 놓여 있고는 한다. 한 사업장에서 1년 이상 재직한 노동자는 일을 그만둘 때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국가는 노동자의 퇴직금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자에게 퇴직금 지급을 강제하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노동자에게 퇴직은 곧 먹고사는 것에 대한 위험이다. 그렇기에 퇴직금이라도 받아야 이러한 위험에서 조금은 그리고 잠시는 안전할 수 있다. 그만큼 퇴직금은 노동
온유한 사람은 자아를 떠나 신과 하나가 된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지만,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물을 이길 수는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 천하에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노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억지로 저항하는 자는 상황 쪽에서도 그에게 저항하고, 거기에 양보하는 자는 상황도 역시 그에게 양보한다. 만약 네가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거기에 저항하지 말고 물 흐르듯 거기에 맡기는 것이 좋다. 상황을 거스르는 자는 상황의 노예가 되지만, 거기에 순응하는 자는 그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탈무드) 현자는 선을 행하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며,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결코 서운해하지 않는다. 사디가 말했다. “나는 파르티아 지방에서 호랑이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사디여, 놀라지 말라. 다만 너의 머리를 신의 멍에에서 빼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그 어떤 것도 멍에에서 너의 머리를 빼지 못할 것이다.’라고”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고자 할 때는 매우 강하지만,…
첫사랑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차라리 슬픔이었다. "언제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내 질문에 그는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렁해졌다. 그날 수업 주제는 첫사랑이었다. 20대 초반, 나는 장애인 야학 교사였다. 어떤 성인 장애인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그는 자기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었다. 수업에 사용할 한글 교재를 찾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알록달록한 그림과 스티커, 큼직한 활자는 스무여섯 살 청년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유아용 교재로 한글을 배우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직접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주제를 정해 대화를 나누며 녹음했다. 녹취를 풀어 문법에 맞게 글을 다듬고 이를 모아 교재로 엮어냈다. 그의 머리와 가슴 언저리에 머물던 정직한 시간 속에서 곰삭은 어휘가 종이 위에 펄떡거렸다. 경험과 생각이 자신의 언어로 정리된 교과서는 효과적이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한글을 익혔다. 뇌성마비 장애인이라 그의 발음을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가 겨우 목구멍을 열어 내놓은 건 어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