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남프랑스 사투리에 겁 많고 소심했던 폴 세잔(Paul Cézanne). 놀랍게도 큐비즘(입체파)의 거장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됐다. 이런 세잔의 그림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예쁜 사과였다. 왜 그랬을까. 세잔에게 사과는 우정과 아량, 인간애의 징표였다. '사과바구니'와 '7개 사과의 정물'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세잔의 사과가 이처럼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중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의 부르봉(Bourbon) 중학교. “파리에서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그 학생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이를 본 한 학생이 그 전학생을 도와줬다. 그 전학생은 어느 날 사과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바구니를 선물 받은 학생은 그 후로 계속 사과가 있는 정물만 그렸다.” 사과를 준 학생은 훗날 프랑스 대문호가 된 에밀 졸라(Emile Zola)이고 사과를 받은 학생은 세잔이다. 이 둘이 주고받은 학창시절의 우정. 이 추억이 세잔 그림의 주요 모티브였다. 세잔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생트-빅트아르(Sainte-Victoire) 산이다. 이 산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대장주다. 하늘까지…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노동만큼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사람은 노동하지 않고는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겉치장에 그토록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이 먹을 빵을 제 손으로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종교적 이해와 순수한 도덕성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존 러스킨) 지극히 확실하고 순수한 기쁨의 하나는 노동 뒤의 휴식이다. (칸트) 가장 탁월한 재능도 무위도식하면 사장된다. (몽테뉴) 공정함이란 자신이 남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남에게서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동과 자신이 이용하는 남의 노동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스스로 일할 능력을 잃고 남의 노동력을 가로채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되도록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에 자기가 취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남에게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중, 대중하지만 대중은 고상한 이상에 통일되지 않는 한 우중(愚衆)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
샤갈전을 보고 왔다. 샤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색체의 마술사’라 불리는 그의 그림 속 화려한 색들이 아프다고 말한다. 1, 2차 대전을 살아낸 유태인의 삶, 부인과의 사별, 병마 등 어두웠던 삶은 꿈과 환상 속으로도 피하게 만들었고 이를 화폭에서 살아나게 했다. 전시회 벽에 쓰인 ‘나는 초현실주의자라는 말이 싫다. 나는 나의 현실만을 그린 것이다’라는 샤갈의 말 역시 그래서 아프다. 샤갈의 말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Frieda Kahlo/1907-1954)를 떠오르게 했다. 샤갈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고통도 무게 잴 수 있다면 샤갈은 프리다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지 않을까. 평생, 흘린 피를 찍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정도로 고통의 극지를 오체투지 했던 프리다. 1907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프리다는 말도 배우기 전 어머니를 잃었고 6살에는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다리를 절었다. 10대 때 대형 버스 사고로 중상( 강철봉이 여린 배를 뚫고 관통하고 다리, 골반, 쇄골 등이 부러지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을 입어 30회 넘게 수술했지만 장애와 불임의 몸이 된다. 20살에 21살 많은 남자,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으
청년 인구 비율(24.09%)이 경기도내 31개 시·군 가운데 가장 높은 수원시가 지난 22일 ‘수원 청년정책 발전 방향 정책연구 학술용역 최종보고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날 발표된 연구결과가 심각하다. 지난해 12월 수원시 거주 만 19~39세 청년 622명(남성 248명·여성 374명, 기혼 195명·미혼 427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수원 청년 10명 중 9명이 “사회적 어려움 정도가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이 겪는 사회적 어려움 정도’를 묻자 응답자의 87%가 ‘심각하다’(‘매우 심각’ 45.5%, ‘약간 심각’ 41.5%)고 답했다. “청년정책이 필요하다”는 응답도 비슷하게 나왔다. 일자리분야에서 ‘청년에게 가장 필요한 정책’을 물었더니 ‘고용환경 개선’(31.5%), ‘기업 취업연계 프로그램 제공’(30.5%), ‘취업 준비 비용 지원’(23.6%) 순이었다. 주거 분야는 ‘사회초년생, 신혼부부를 위한 일반주택 공급’(39.7%)·‘주택 비용 지원’(37.3%) 응답이 많았다. 복지·생활 분야에서는 ‘금융자산 형성지원’(33.6%)이 제일 많았고, ‘생활비 지원’(32.8%), ‘출산·육아 지원’(16.1%)등의
1. 박막례 할머니(80세, 가명) 오랜만에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오시는 박막례 할머니 얼굴이 많이 부었다. 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를 장복했을 때 나타나는 문 페이즈, 쿠싱증후군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떨어진 아들네 집에 계시면서 너무 아파서 주사 몇 번 맞으셨단다. 그 주사 또 맞으면 콩팥 다 망가진다고, 침으로 살살 달래보자고 말씀드리고 치료실에 뉘어 드렸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 도박 중독이었다. 돈 내놓으란 말에 새끼들하고 먹고 살 것도 없다고 하면 무섭게 때렸다. 얼굴 맞으면 표시나니까 죽자고 얼굴만 가렸다고 한다. 그러면 몽둥이로 등을 치고 배를 쑤시고 온몸을 깨털 듯이 두들겨 팼다며, 징하디 징한 결혼 생활을 회고했다. 생활비를 벌어올 턱이 있나. 다 팔아먹어 땅뙈기 하나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고, 공장에 가서 열두 시간씩 일하고, 치매기 있는 시어미를 찾으러 천지사방을 헤매고, 그런 와중에 다섯 남매를 거둬 학교를 보냈다. 본인이 못 배운 한을 풀기라도 하듯 아들도 딸도 모두 지성으로 가르쳤다. 그 덕에 오 남매는 모두 잘 자라 다들 제 몫을 하며 산다. 그런 이야기 끝에 할머니는 이렇게 말
중국의 소설가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이 소설은 판금조치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영화로 제작될 수 없다. 한국의 장철수 감독이 영화화한 배경에는 이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은 서사가 굵직하고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이 극적이어서 영화문법과도 일맥상통한다. 중국 인민군 사단장 관사 취사병인 우이왕은 사단장 부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민을 위한 복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사단장이 장기 출장을 떠난 사이 그의 젊은 부인 류롄에게 유혹을 받는다. 우다왕이 거듭 뿌리치자 류롄은 "인민을 위해 어떻게 복무하겠다는 거지?" 물으며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어서 벗어." 하고 재촉한다. 그는 끝내 무너져 내리고 그녀에게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아주 잘했어."라는 찬사를 받는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는 모택동의 유명한 연설 제목으로 혁명정신을 상징하는 언어다. 그런데 소설은 이 성(聖)스러운 언어를 성(性)스러운 언어로 끌어내린다. 변질되고 타락한 혁명을 극명한 대비를 통해 드러낸 것이 이 소설의 백미다. 인간해방을 내건 공산당 체제도 억압과 부패로 찌들어 있다는 서사적 보고
자아는 우리 내부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가리는 덮개이다. 우리가 자아에서 벗어날수록 우리 안의 신성은 더욱더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는 자아에 대해 고민하고 자아에 얽매이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나약해지고 더욱더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집착하거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강해지고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만약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무슨 일을 도모한다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 진리는 그것이 자신의 자아를 버린 사람의 입에서 나왔을 경우에만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탈무드) 인간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플라톤) 자신의 명성과 육체 속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 자야말로 인생의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부처) 이야기 도중에 자기를 의식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쳐버린다. 자기를 완전히 잊고 자아를 떠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도움을 주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은 물론 타인의 인생을…
말 많고 탈 많은 2022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끝났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91개국이 7개 종목에 출전하였다. 이는 2021년 도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던 46개 종목의 205개 국가에 비하면 반쪽짜리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의 정신은 고스란히 유효하기 때문에 세계인의 체육행사로써 인정받고 있는 것이리라. 주지하듯이, 근대올림픽은 1896년 4월 쿠베르탱 남작과 14명의 올림픽 위원회 위원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에 의해 서기 393년까지 중단되었던 올림픽은 1500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다시 시작되었다. 쿠베르탱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은 올림픽을 통해 ‘세계평화를 실현하겠다는 이상’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스포츠를 통한 평화와 공존은 올림픽의 중요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먼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기 위해 1936년 베를린에서 열렸던 11회 하계 올림픽을 꼽을 수 있다. 히틀러는 게르만족과 나치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장으로써 올림픽을 이용했다.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의 의도대로 독일이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나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