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바람에 가지마다 몽우리가 진다. 햇살 가득한 팔달산 자락에 위치한 경기도 의회 1층 현관앞,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의자에 자리하고 있다. 2018년 12월 14일 전국지방의회 최초로 경기도의회를 찾아온 평화의 소녀상은 광화문 일본 대사관 앞에 처음 소녀상이 설치된 날을 기념해서 건립됐다. 그런데 경기도의회에 자리한 소녀상의 머리형태는 여고시절 필자가 했던 단발머리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목을 둘레삼아 가지런히 하여 자른 머리가 아닌 울퉁불퉁 거칠고 깡총하다. 평화의 소녀상의 거칠게 잘려진 머리카락을 보고있노라면, 부모와 내가 자란 고향을 뒤로하고 동력잃은 나라에서 힘없이 강제로 끌려가야만 했던 가슴뭉클하고 아픈 모습의 시대적 상황 그려진다. 비라도 내리는 날엔 머리에서 눈으로 그리고 볼로 흐르는 빗물은 슬픔을 더한다. 그리고 소녀상의 발은 마음편히 땅에 닿지도 못한 채 들려있는 맨발이다.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암담한 불안감과 심적고통, 나약함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 같아 볼때마다 가슴은 시리도록 서럽다. 해방은 감격이지만 소녀는 귀향(歸鄕)을 못 하거나, 돌아와도 마음은 편할리 없다. 스스로 지은 죄가 아닌데 못할…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친일 청산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일부 친일 세력들은 “해방된 지가 언젠데, 무슨 잔재가 남아 있다고 아직까지 친일 청산을 얘기하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독일과는 반대로 일본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역사 왜곡마저 서슴지 않고 있다. 이걸 또 옹호하는 한국인들이 있으니 그저 한심할 뿐이다. 이들은 ‘토착왜구’라고 불린다. 이에 대해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친일세력의 반발로 친일 잔재 청산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며 “그 후과를 지금도 겪고 있으며, 잊을만 하면 독버섯처럼 되살아나는 과거사에 관한 망언 역시 친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지사는 지난 1일 3·1절 기념사를 통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지만 ‘미완의 해방’이었다고 지적했다. 피해 당사자인 한반도가 분할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냉전의 최전선으로써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 지사는 “왜곡된 역사는 왜곡된 미래를 낳습니다. 우리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보복을 위해
세탁기가 있고 맨발로 들어가기엔 바닥이 차서 슬리퍼를 신어야 하는 곳, 종종 빨래를 걸어 말리기도 하고 화분을 놓아 작은 정원을 만들 수 있는 햇빛이 잘드는 곳, 가끔 삼겹살을 부르스타에 구워먹으며 소주 한잔할 수 있는 환기가 잘되는 곳, 한국 아파트의 발코니 공간이다. 원래 발코니는 건물의 외벽 창가에 돌출되어 마련된 공간으로 바깥 경치를 즐기며 쉬기 위한 공간으로 유럽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한국 아파트 단지에서 발코니가 처음으로 선보인 것은 1960년대 마포아파트에서였다. 마포아파트는 6층 정도의 공동주택으로 건물 외관이 단순하고 기능적이어서 유럽풍의 운치는 없었으나 개방형 발코니가 세대마다 있었다. 여름의 장마, 태풍, 고온 다습 무더위, 겨울의 삭풍과 강추위 등으로 발코니 내측의 창문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다. 봄, 가을이라 해도 발코니에서 보이는 것은 앞 동의 세대들의 집안 모습인 경우가 많아서 여유보다는 무안함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발코니에 차가운 바람을 막고 사생활을 보호할 샤시 창문이 설치되었고 점점 실내공간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공간은 구조적으로는 실내인 듯 보이나 여전히 냉난방에서 제외되는 애매한(?) 공간이 되었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여자배구 국가 대표 선수 등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 폭력 문제로 떠들썩하다. 그들이 10여 년 전 초중고 시절에 벌인 일들은 끔찍해 입에 담기조차 힘들다. 스포츠 선수들의 과거 폭력을 현재화해 엄벌에 처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전근대성을 벗어나고 있다는 하나의 조짐으로 읽힌다. 폭력은 단순히 나쁘다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타자를 굴복시켜 주종 관계를 일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기득권층의 무기이자 숨겨진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의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멀리 갈 것 없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합법을 가장한 제도적 폭력이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기득권층이 자신들을 특권화하는 수단으로 가하는 이 수직적 폭력을 보통 사람들이 내재화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평화와 정의, 민주주의와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폭력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체화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할까? 정당성 없는 지배질서는 당연히 멈추지 않는다. 멈추기는커녕 합리화해주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다. 내재화한 폭력은 자연스레 자신들과 엇비슷한 부류인 보통 사람들에게 향한다. 프랑스 의사이자 알제리 독
K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식구를 이끌고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갓 돌이었던 K는 열병을 앓았고 소아마비가 와서 다리를 심하게 절게 되었다. K는 아무 목표도 없이 중학생이 되었다. 희경중학교 다닐 때 김광석(우리가 모두 아는 그 김광석 말이다!) 선배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었다. 그래도 아무런 의욕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과 같았다. 덕수상고에 갔지만 상고를 졸업해도 장애인이 갈 직장은 없었다. 작은 아버지 신발도매상 장사를 도왔다. 노점상도 해봤다. 그러던 중 덕수상고 선배를 만났다. 마침내 K는 할 일을 찾았다. 삶에 목표가 생긴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K는 장애인 운동뿐만 아니라 ‘세상을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하고 공장에 가고 조직에 들어가고 징역살이를 했다. 그러다 장애우대학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였다. 장미꽃보다 민들레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언젠가 대성리로 엠티를 갔는데 그녀는 K의 오리배를 탔다. 유난히 검은 눈에 반짝이는 눈동자, 동글동글한
예술은 사람들을 합일시키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예술도, 모든 사람들을 합일시키는 보편적인 도덕 이념이 없다면, 하나의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경우 많은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을 무익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그로 인해 끊임없는 불만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칸트) 예술이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부를 숭배하고 가난을 우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리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취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좋은 일을 고취할 수도 있고, 나쁜 일을 고취할 수도 있기에(후자가 훨씬 쉽다), 예술이라는 수단에 대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미(美)는 요사스러운 할망구이다. 그 마력에 걸리면 신념이 녹아 피가 된다. (세익스피어) 부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 현대 예술은 창녀와 같다. 진리가 현인을 위해 존재한다면 미는 따뜻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실러) 예술에 있어서 작가는 아무것도 창작하지 않는다. 다만 능력에 따라 자연을 통역하고 있을 뿐이다. (로댕) 문학은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거울이다.(토니 모리스) 시인은 어둠에서 빛을 캐내는 존재이다.(다르위시) 사랑과 고독은
코로나 재난지원금과 대규모 국책사업 추진으로 나랏빚이 크게 늘면서 여당을 중심으로 증세론이 활발하다. 증세론은 정치권 최대 이슈로 떠오른 기본소득제도와도 연계돼 있다. 오랫동안 복지는 늘리자면서 증세는 반대하는 모순 속에 찌들어 있던 정치권이 이 만큼이라도 정직한 논쟁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진전이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재정난 타개를 위해 증세 말고 찾을 수 있는 해법이 뭐가 있나. 이젠 솔직할 필요가 있다. 야당이 정부·여당에 “퍼주기 정책 남발”이라는 비난을 퍼부으면서 대안을 말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다.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은 그래도 세금 부담을 늘리면서 복지도 늘리는 ‘중부담·중복지’를 주장해왔다. 유 전 의원은 다만 “경기가 좋아도 조세저항이 심한데 지금은 적절한 시기라 보기 어렵다”며 시기 조절론을 펼치고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국정운영을 책임진 여당으로서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기본소득제를 줄기차게 주창하고 있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증세에 대한 국민 합의를 전제로 목적세 추진을 거론한다. 그는 조세감면 축소와 함께 기후변화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탄소세, 디지털 데이터세 등의 신설과 함께 불로소득에 부과하는 기본소득
지난달 25일 이 나라 법치에 중대한 진화(進化)의 싹을 보여 준 소중한 판결이 있었군요. 대법원 1부(주심 이흥구 대법관)가 비폭력·평화주의 신념으로 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한 겁니다. 시중에 말이 많네요. 너도나도 병역 면제를 위해 양심을 악용하면 어쩔 거냐는 걱정이 흐드러졌네요. 분명 그런 우려는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양식을 언제까지 ‘짐승’ 수준으로 보는 편견으로 갈라 세우고 난도질할 건가요? 지난 2013년 2월 제대하여 예비역에 편입된 A씨는 2016년 11월부터 10여 차례나 예비군 훈련, 병력 동원훈련을 거부했습니다. 예비군법과 병역법 위반 혐의로 14번이나 고발돼 재판을 받아온 그는 훈련 불참 사유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전쟁 군사훈련에 참석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른 행위’라고 강변해왔답니다. 우·무죄를 가른 법리적 판단기준은 ‘진실성’ 여부였습니다. 같은 날 대법원에서 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은 B씨는 ‘유죄’ 판결을 받았거든요. B씨의 경우는 군사훈련과는 본질적 관련성이 없는 ‘권위주의적 군대 문화, 군대 내 인권침해·부조리’ 등을 병역거부 사유로 들었지만 ‘진실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앞서 얼마 전
'처음' 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은 항상 특별하다. 첫사랑, 첫학기, 첫등교, 첫만남 등. 매년 3월이 되면 학교는 다시 처음을 맞이한다. 새 학년, 새 학기의 출발이다. 움크렸던 겨울을 지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이 될 때, 아이들은 한살 더 커서 새로운 학년을 맞이하러 학교로 온다. 항상 설레기만 하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설렘보다 떨림이 더 많다. 나만해도 그렇다. 개학날이면 늘 배가 아팠다. 원체 예민한 장을 가졌기도 했고, 불안과 걱정 많은 성격이 장을 괴롭힌 탓이기도 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학교에 도착하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교문에서부터 교실까지 가는 길이 꽤 멀게 느껴졌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면 뛰어가서 나와 같은 반인지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서며 아는 얼굴을 찾아 두리번 거렸다. 친한 친구가 반에 앉아 있으면 기뻤고, 아는 얼굴이 보이면 배 아픔과 심장의 덜덜거림이 좀 나아졌다. 운 나쁘게 생면부지의 사람들만 그득그득 할 때도 있었다. 그때부턴 일주일 내로 어떻게든 친밀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다. 운 좋게도 반에는 나와 기운이 맞는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의 기운을 영양분 삼아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