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이다. 방 한 칸을 세를 주었다. 30대 총각으로 그런대로 순수한 젊은이였다. 그때만 해도 궁핍하던 시절이라 청년은 청계천 가까이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돈을 모으긴커녕 월세 내고 밥 먹고 살기도 빠듯한 모양이었다. 밤이면 리어카를 끌고 개천변에 나가 과일을 팔았다. 과일이란 게 그랬다. 앞으로 돈 받고 뒤로 밑지는 게 과일 장사였다. 하루 이틀 묵혀두면 썩고 멍들고 비틀어진 과일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장래가 빤한 봉제공장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입에 풀칠할 일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 안주인인 나한테 죽을상을 하고서 손을 내밀었다. 돈을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 돈으로 운전면허증을 따서 택시를 몰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털어놓았다. 나도 형편이 빠듯했지만, 셋방 청년의 입장이 하도 난처해서 얼마간 돈을 빌려주었다. 청년은 열심히 운전면허 교습장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밤이면 후줄근한 모습으로 들어와 늦은 시간까지 이론 서적을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운전면허 시험 보는 날이 다가왔다. 긴장한 나머지 마지막 주행시험에서 불합격이 되었다. 청년은 낙담했다. 나는 가끔 먹을 것을…
공공의 장소에 가면 다양한 안내문을 보게되고 안내문의 홍수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 이용한 깨끗한 화장실에서 ‘성인이용금지’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소변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유아용’이다. 안내문에 성인이용금지가 아니라 ‘유아용’이라고 쓰면 될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신발이 울고 있어요”라는 안내문은 조금 강렬한 표현으로 많이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글을 떠올리게 한다. 수년전 설 명절에 농수산물도매시장 입장티켓을 뽑으려 하는데 ‘사용금지’ 안내문이 보였다. 오늘 쉬는 날인가 하면서 입장했다. 나중에 확인된 바는 설 연휴기간에 일부 가게만 문을 열기에 주차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차량 입장티켓을 뽑지 않고 들어가도 된다는 표현을 고작 ‘사용금지’라 한 것이다. 좀 길어도 이렇게 안내했으면 했다. “우리 시장을 애용해주시는 시민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휴기간 중에 주차장은 고객님께 무료입니다.” 공원길을 산책하다가 이상한 문구의 안내문을 발견했다. “공원내 애완견 목줄 미착용 금지”. 한참만에 플래카드 글의 내용을 이해했다. 공원에 애완견을 데려오실 때에는 반드시 목줄을 매어 주시라는 안내문이다. ‘미착용을 금지’한단다. 행정기
2020년 1월 코로나 바이러스가 출몰하여 세상을 떠들썩한지 벌써 8개월째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물난리로 많은 지역이 괴로움을 겪었고 더위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만 한편으로 잊어버린 자연의 고마움을 상기 시켜준다. 또한 마스크를 쓰게 함으로써 막말을 자제하게 하였고 장마로 인간의 탐욕을 씻어 내렸다. 더위가 서서히 물러가며 싱그럽고 청아한 가을의 공기와 풍광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가을은 아름다움의 향기를 머금은 풍요와 사색의 계절이다. 가을의 맛과 멋은 우리의 눈으로, 코로, 귀로,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특히 가을은 단풍의 화려함과 낙엽의 쓸쓸함 그리고 황량한 겨울의 문턱이라 더욱 인간을 사색적·철학적으로 만든다. 요즈음의 시기를 ‘아름다움과 행복을 머금은 계절’이라 부르고 싶다. 정말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상쾌하다. 이것이 바로 가을의 향기에 취한 행복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행복한 시기를 자유롭게 만끽하고 싶다. 그러나 지난주부터 바이러스 확진자수가 급증하였다. 먼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정부의 책임이 막중하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합리적인 정책과 적합한…
파적破寂 박 은 수 깊은 산사에서 우는 범종소리 우우우 뼛속까지 사무친 울음처럼 전율하는 허공 자지러지자 하혈한 달빛 천강에 낼앉아 파문 이는가 눈먼 땅 위 귀 열어 젖힌 병약한 무리들 그 가난한 떨림 속 달빛 향연에 녹아드는지 파동에 애를 태우는지 하도 애절하오만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단장斷腸에 주검만 하오리까마는 들까마귀 새까맣게 들앉아 까악까악 울어대는 밤 뭇사랑, 간곡하다 1952출생 전북 김제출생, 경희대 미대, 홍익대학원 미술과 졸업, 2004 ‘시와세계’로 등단. 경기문화재단 시창작지원금 수혜로 시집 ‘반쪽나무’ 발간. 한국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회원
아무도 원하지 않던 코로나19 재확산 국면이 심상찮은데, 여야 정치권은 책임소재를 놓고 무한 정쟁(政爭)을 벌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전광훈 목사와 통합당을 엮어 코로나 재확산의 책임을 돌리는 데 열중이다. 반면 미래통합당은 문재인 정부가 감염병이 다소 뜸한 틈에 경제 활성화 우선 정책을 쓴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주장을 편다. 불난 집 팽개쳐두고 멱살이나 잡고 늘어지는 꼴들이 너무 남사스럽지 않나. 여권에선 연일 ‘광복절 집회 배후에 통합당이 있다’, ‘광복절 집회를 방조한 통합당이 석고대죄하라’는 주장이 쏟아진다. 민주당 대표 선거에 나선 김부겸 전 의원은 극우세력을 지목해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테러나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배후에 미래통합당이 있다”고 말했다.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한 이원욱 의원은 “바이러스 테러범을 방조한 통합당 김종인 위원장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극언했다. 야당의 반격도 못지않다.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병상을 대폭 감축하고, 연휴를 만들고, 소비 쿠폰, 종교 모임 허용, 스포츠·관광 해제 등 안이한 방역대책을 했다”고 비판했다. 하태경 의원은 “방역방해죄 구속 1호는
소 원 박 종 해 고요한 아주 고요한 간지럼타는 실바람의 소리나 혹은 꽃의 숨소리라도 들릴 듯한 나라 고요한 아주 고요한 만리 밖 갈대 우는 소리나 가랑잎 구르는 소리라도 들릴 듯한 나라 눈부신 은빛 날개로 끝없는 창공을 노 저어 그 고요한 나라에 닿고 싶다. 저 짙푸른 바다 위를 머흘 머흘 흘러가는 흰구름 위를 새가 되어 날으고 싶다. 소란스런 세상에서 멀리 멀리 정결한 휴식을 갖고 싶다. 박종해 1942년 울산 출생. 198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탕비누방울’ 외 12권, ‘시와 산문선집’이 있다. 이상화시인상, 성균문학상, 대구시협상, 울산광역시 문화상, 한국예총예술대상등 수상. 울산문협회장, 북구문화원장, 울산예총회장, 국제펜한국본부이사 등 역임.
속내를 드러내기 전에 일단 일명 트바로티로 불리며 성악가수에서 트롯가수로 거듭난 김호중 씨에게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둔다. 올해 초, 한 방송사에서 히트 친 트롯경연대회 시리즈를 전회 몰입 감상한 친구가 심야에 전화해 4위한 김호중씨에 대한 격한 팬심을 토로했다. 동영상 검색으로 그를 찾아본 나의 일성은 ‘뭐야? 비디오 가게 아저씨같이 생겨 갖구!’ 였다. 한마디로 외모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 탓에 노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막말 소감이었다. 그런데 신통한 주술처럼 그때 잠깐 들은 목소리가 귀에 걸려버렸고 이후 그의 모든 노래를 찾아듣는 팬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영업하지도 않는 ‘비디오 가게 아저씨’ 운운하며 외모로 속단했던 가벼움을 반성한다. 어쨌든 김호중 씨는 트롯으로 얻은 인기를 지렛대로 여러 방송에 출연, 성악가수 시절 부른 오페라, 대중이 원하는 팝송, 월드뮤직까지 두루 들려주는 전천후 가수로 활약 중인데 어느 날 가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를 불렀다. 함께 듣고 있던 친구가 ‘저 노래, 스페인곡 번안한 거잖아?’라고 아는 체를 한다. 포르투칼의 파두 가수 베빈다(Bevinda)의 노래 ‘이제 됐어요(Ja Esta)’가 원곡이고 이를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서식하는 들쥐 레밍(Lemming)은 이따금씩 떼 지어 달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집단자살 행태로 유명하다. 이들의 행위는 당초 왕성한 번식력으로 순식간에 늘어나는 개체 수를 조절하려는 이성(理性) 행위로 해석됐다. 임신 기간은 20일, 한꺼번에 낳는 새끼 수가 2~8마리에 출산 후 두 시간이면 다시 임신이 된다. 그러나 학자들의 본격 연구로 ‘지독한 근시’와 ‘떼거리 본능에 따른 과속 질주’가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은 민주주의의 반대편에 있다. 만장일치(滿場一致) 역시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의 상징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다양성의 보장에 있다. 다양성을 슬기롭게 소화해내는 방법으로 인류는 민주주의를 고안해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곧 민주주의다. 때로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지만, 논리적 설득 과정을 통해서 구성원들을 성장시키고 조직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의 특장점이다. 불명예스러운 탄핵의 역사를 만들어낸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일사불란의 정치, 배제의 정치, 독식의 정치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지난 2015년 2월 초 당시 여당의 원내대표 유승민은 국회 대표
코로나19 이후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 부산연구원의 책임연구위원 오재환 박사는 코로나19 이후 사회변화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바 있다. 경제구조가 변화해 언택트 소비로 대변되는 온라인 소비 확대, 인공지능·5G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의 실현 가시화, 생산기지 이전 등 공급체계 변화 등을 예상했다. ‘홈족’(Home 族) 문화, ‘집콕’ 일상화, 건강 추구형 관광이 부상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 비접촉 문화의 확대에 따른 재택근무와 스마트 워크 증가, 접촉 완충 공간 요구 등이 늘면서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게 된다고 내다봤다. 아울러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른 자발적인 고립의 증가,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돌봄 증가, 스마트 행정복지 수요 확대도 예상했다. 여기에 더해 건강·위생용품 수요 급증과 원격의료 서비스 확대, 공공 보건의료 시스템 강화, 감염병 예방과 치료를 위한 국제사회 공조와 협력, 연대 등도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지역 산업체계를 정비하고, 서비스 산업 혁신 기반과 신 서비스산업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박사의 말처럼 지금 세상은 새로운 문명 출현에 버금갈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어 경제와 문화예술, 스포츠, 여행
탯줄부터 돈다 - 국립박물관 나한전 나 숙 자 나를 찾기 위해 아라한의 둘레를 돌고 돌고 공감, 사랑, 화, 슬픔 속 나는 어디 있는가 오백 년 만에 빛을 안는다 짠하다 목이 잘린 고통 팔이 잘린 시간 그 모든 것이 화엄의 세계라고 순간순간을 미소로 말하는 그들 오백 아라한 내 미소는 어떤 걸까 나를 볼 수 없어 탯줄부터 돈다. 나숙자 1951년 전남 나주출생. 문예사조로 등단. 시집에 ‘작은 자유를 위하여’ 외 다수. 영랑문학상 수상, 여덟 문인 미술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