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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정치가 허위와 실종된 정치문화

 


 

허위를 항일지사로만 아는 사람이 많다. 항일 의병장으로 이름을 알리고,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최후를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허위는 정당정치가 도입되기 전에 ‘책임 정치’의 문화를 이 땅에 선보인 뛰어난 지도자였다. 의병항쟁이 무위로 돌아가자 한양으로 올라온 허위는 세 차례에 걸친 ‘소청운동’을 연속적으로 벌였다. 첫 번째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자는 ‘복수소청’이었고, 두 번째는 주변 열강의 침탈을 분쇄하고 내정 개혁에 필요한 ‘건의소청’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국정운영 현안에 대한 ‘광의소청’이었다.

 

허위는 이러한 소청운동으로 여론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황국협회에 참여하여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 대한 반대활동을 벌였다. 허위를 비롯해 황국협회의 선봉에서 근왕운동을 펼친 인물들은 을미년에 항일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세웠던 위정척사 이념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거리에서 싸우고,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허위의 경륜과 포부를 들은 고종이 부르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관직에 연연하여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조금도 유보하지 않았다. 평리원 판사와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 등의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일본의 이권침탈에 반대하는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일본과 친일관료들에게는 눈엣가시였지만 조선의 민중에게는 긍지였다. 그는 관직을 얻고, 지키기 위해서 말을 바꾸거나 협잡을 하는 일이 없었다. 왕의 앞에서 온갖 아첨을 하고 돌아서서는 외세의 주구 노릇을 하는 친러파 이용익과 친일파 이근택, 둘의 머리를 베고 자주외교를 하라고 왕에게 당당히 요청했다. 임금을 향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예부터 그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다른 나라가 와서 침범했다는 것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오직 그렇게 못해서 조정의 정사가 어지럽고, 백성이 원망하며, 군중이 배반하여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옵니다’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다시 총을 잡은 허위는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사흘 뒤 교수형을 당했다.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였다.

 

허위는 교수형 집행 직전 극락왕생을 비는 일본 승려의 염불을 거부했다.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내 어찌 네놈들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는단 말이냐.’

 

풍운의 시대를 살고 간 허위의 정치역정은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과 포부에 따라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고, 최후의 순간까지 책임을 졌던 정치 지도자였다는 사실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모름지기 상대를 깎아내리고 헐뜯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의 정치와 그것을 무한 반복, 재생산하는 걸 사명으로 여기는 언론을 보면서 자신의 포부와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허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미 백 년 전에 허위가 보여주었던 책임정치의 문화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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