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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

 

필자는 본 난(9월 7일 자)을 통해 '서사 부재 시대의 비극'을 쓴 바 있다. 그런데 재독 철학자 한병철 선생의 『서사의 위기』가 8일 뒤인 15일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이 먼저 출간되었다면 읽은 뒤 보다 풍부하게 글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임이 인다.

 

필자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흉악 범죄가 유행이다시피 하는 현상을 서사의 부재에서 찾고자 했다. 한 선생이 책의 근저로 삼고 있는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근대는 (대)가족 공동체의 붕괴를 통한 개인의 출현을 근간으로 한다. 근대 사회는 공동체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특히 근대 후기로 접어든 한국의 경우 학력계급사회가 되어 개인의 파편화·원자화를 더욱 부채질한다. 카페가 건물마다 하나씩 들어서 있는 것은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작용하는 것으로 필자는 보았다. 이는 서사 부재 시대라는 강력한 반증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통한 서사의 부재를 말했다면 한병철 선생은 SNS를 분석의 틀로 삼아 서사의 위기를 풀어나간다. 그의 분석을 압축하면 페이스북 등 SNS는 서사가 아닌 셀링 스토리(Selling Story)다. 이야기가 상품 판매를 위한 스토리에 지나지 않아 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사의 위기』에 따르면 서사는 8가지 특징으로 정리된다. 이야기하다, 자기 존재, 삶의 주체, 과거와 연결, 경험의 축적, 타인에게 공감, 공동체를 이룸, 방향성 있음 등이다. 반면에 스토리는 이 서사와 정반대다. 설명하다, 자기 광고, 상품의 소비자, 과거와 단절, 정보의 나열, 타인과 정보교환, 커뮤니티를 이룸, 방향성 없음 등이다. 서사와 스토리는 이처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를 풀어보면 SNS는 궁극적으로 자기 광고를 위해 기능하기 때문에 정보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이야기가 아닌 설명만이 필요하다. 경험의 축적은 쓸모없는 것이기에 과거와의 단절은 필연적이다. 타자와는 정보교환을 위한 커뮤니티로 묶여만 있으면 그만이다. SNS 스토리에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할 리 없다. 공동체 지향이 아니므로 어떠한 의미도 생성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는 디지털 문명에 따른 SNS 미디어 시대다. 이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가 없다. SNS가 개인의 시대에 걸맞는 신무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공동체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현실화할 수 있다. 그러나 SNS는 한 선생이 '인문학의 아버지'로 뒤늦게 부상한 발터 벤야민에 기대어 분석한 『서사의 위기』에 따르면 오히려 해악이다. 개인을 광고화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학력계급사회 고착화 등으로 불평등이 심화하는 구조적 모순 때문에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수위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서사가 존재할 리 없다. ‘묻지마’ 칼부림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게다가 SNS는 한 선생이 지적한대로 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나 SNS에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공동체 지향의 서사도 생각보다 많은 게 사실이다. 오프라인의 카페처럼. 이 오아시스를 『서사의 위기』가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한 점 희망이라 해도 우리는 기대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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