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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우리가 사할린으로 간 이유

 

나는 사할린 출신 영주귀국자

 

나는 2009년 12월 3일 아내와 함께 러시아 연방 사할린(Sakhalin)에서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로 영주 귀국했다. 인천공항에서 대한적십자사가 제공한 버스를 타고 새로운 보금자리인 문산읍 당동 3단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적십자사 직원의 인솔 하에 307동 504호에 들어갔다. 아파트 문턱을 들어설 때 먼 길을 오는 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담한 거실은 우리의 마음에 쏙 들었고 매우 따뜻했다. 거실 한구석에 주방 1개, 방 2개, 욕실과 넓은 베란다. 남은 생의 터전은 기대 이상으로 좋아 보였다. 편안한 생활을 위해 필요한 모든 가구와 생필품들도 잘 마련돼 있었다.

 

67년, 사할린에서 보낸 기나긴 세월이 문득 떠올랐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부모, 그리고 8남매가 편의시설 하나 없는 단층집에서 어렵게 살았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침대도 없었고 식사도, 잠자리도, 공부마저 그저 방바닥에서 했다. 겨울은 추워서 벌벌 떨었고, 여름에는 무더위를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1945년 해방 후 생활 수준은 나아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집에서 살아야 했다. 소련 정권은 국가가 건설한 아파트를 소련인들에게만 무료로 분양했다. 무국적자인 나는 사할린에서 거의 70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파트 생활은 한 적이 없다.

 

일제는 1930년대 말부터 40년대 초까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부모를 강제로 사할린으로 끌고 가 혹독한 노동을 시켰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할린 동포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후반에도 연해주에서 사할린까지 한국인이 이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사할린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일, 가라후토)을 차지했을 때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자손이다.

 

일본의 사할린 개척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1920년대에 한국인의 이주도 본격화되었다. 이주와 강제 동원 모두 1938년부터 194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이 시기의 이주자는 주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 출신이었고, 석탄광산, 벌목장, 군사기지 건설 사업에 종사했다.

 

사할린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1689년 러시아와 청이 체결한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약 150여 년 간 연아무르 지역을 떠나야 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시모다 조약(1855년)과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 (1875년)에 따라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1904–1905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1905년 8월 23일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영토를 일본이 차지했다. 

 

이렇게 섬의 영토는 두 개로 나뉘고 남부는 일본에 넘어갔다.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을 받은 일본정부는 그곳에 행정국과 자체통치조직, 선거 체계를 만들었다. 쿠릴 열도는 홋카이도 총독 체계로 편입되었다. 1907년 남사할린 지역에 가라후토(樺太 화태) 총독 체제가 수립되고 1908년에는 도요하라(豊原)(현재 유즈노사할린스크)시가 중심이 되었다.

 

새로운 땅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도, 한국인들도 사할린으로 갔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은 가혹한 군사정치체제를 수립하고 경제 팽창을 진행해 국내 또는 국외에 있는 위험한 군수기업들에서 한국인을 노예처럼 부렸다.

 

 

일본의 억압과 박해, 계획적인 대량학살 정치는 다수의 한국인들을 외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또는 가족과 함께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1904~1905년과 1945년의 2차례에 걸친 러·일 간 무력 충돌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혼과 심장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일본 식민지 권력에 대한 모든 비판과 선동, 파괴 공작을 없애기 위해 폭동, 소요, 무질서, 언론, 일본 황실 권위 훼손, 정치범죄, 사회질서유지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법령과 명령이 만들어졌다.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까지 실행했다. 1930년대 초 농민들은 기아의 한계에 이르렀다. 유일한 탈출구는 외국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은 만주, 시베리아, 일본으로 떠났다.

 

가라후토 총독 체제는 사할린에서 가능한 최대량의 천연자원을 확보하도록 강제 노역을 시켰다. 이곳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산업은 무단으로 벌채한 목재 생산과 가공이었다. 또한 남사할린 전체에서 30개에 달하는 새로운 탄광 개발을 시작했다.

 

전시상황에 석탄 수출이 지역 소비보다 많아졌고 해마다 계속 증가했다. 사할린 섬의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오지세이시(임산업)', '미쓰비시'와 '미쓰이(석탄사업)'등과 같은 독점기업들의 혹독한 경쟁이 진행되었다.

 

일본 경제의 군수화가 시작되었고 통화팽창이 강화되었다. 일본제국은 자신의 영향력을 아시아 대륙의 내륙으로 확장시키려는 야욕을 보였다. 사할린에서 군용비행장 건설을 시작했고 철도건설이 완성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군사 및 경제적 상황을 첨예화시켜 노동자원의 급격한 증대를 필요로 했고, 이는 한반도에서 충당했다. 초기에 일본 식민 권력은 과대한 약속을 하면서 '달콤한 말로' 자원 모집을 하는 형태로 이주를 진행했지만 이것으로는 필요한 인적자원을 충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38년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총동원'에 대한 법령을 공표했다. 1939년 9월부터 한국인들의 대규모 강제 동원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국민직업능력신고'와 '노동동원'에 대한 법령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40년과 1944년 사할린과 태평양 남서부 지역의 도서에 파견할 젊은 한국인 남성과 여성들에 대한 총동원을 실행시켰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약 200만 명의 젊은이들이 차출되었고, 그들 중 약 6만 명이 사할린으로 보내졌다. 이들의 처지는 처참했다. 대부분 군용 비행장과 철도, 탄광, 목재 가공 등 고되고, 위험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 했다.

 

강제동원자들의 증원

 

우리 부모님은 1939년 일제가 공포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낯선 이국땅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아버지 박득수는 1915년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비교적 지식수준이 높았다. 조선 소학교에서 일본어와 조선어를 배웠고 서당에서 2년간 한문도 공부했다. 아버지는 16세 때 누나를 따라 사할린에 들어갔다. 돈을 벌기 위해 7년 동안 그는 갖은 일을 다했다. 농장 노동자로, 부유한 일본인에게 고용된 노동자로 일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강순예과 결혼 했다. 이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지만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1939년 3월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다. 첫아이를 임신한 어머니는 남편을 찾아 사할린으로 떠나야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인들은 모두 본국으로 귀송됐지만 한국인들은 사할린에 그대로 잔류해야 했다. 1994년 2차례의 한·일 정상회담을 바탕으로 '영주귀국시범사업'이 실현됐다. 영주귀국 대상자로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사할린에서 출생했거나 거주한 자들이다.

 

러시아의 가장 큰 섬 사할린

 

 

사할린 섬은 북위 46도에서 55도에 이르는 남북 길이 948km의 길쭉한 섬 (면적 76400㎢)이다. 이 섬은 러시아의 수많은 섬 중 가장 크다.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으며, 쿠릴 열도와 함께 러시아의 사할린 주를 이룬다.

 

사할린과 우리 동포의 애환

 

비극의 시작

 

1905년 러·일 전쟁 후 사할린 남쪽의 절반이 일본에 점령되었다. 목재와 석탄, 석유 등 자원이 풍부한 이곳에 1920년대부터 한국인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는 1932년 후에 전시 경제와 인플레이션 경제로 변화했다.

 

그 결과로 조선인 노동자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15만 명이 사할린으로 끌려왔다. 1946년 소련 정부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4만 3000여명의 ‘조선인’이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남한 출신이었다.

 

 

그들은 홋카이도 하코다테를 거처 와카나이에서 배를 탔다. 300톤 급의 철선 맨 밑바닥에 42명의 조선인들이 짐짝처럼 실려왔다. 8시간쯤 걸렸는데 밤 7시경 캄캄한 코르사코브(구 오오도마리)항에 도착했다. 나이부치 (현재 브이코브) 탄광에 끌려온 이들은 그 다음날 일을 시작했다.

 

 

광부들은 석탄을 파내는 기구와 마찬가지였다. 하루 12시간 이상 탄을 캤고 밥도 선채로 먹어야 했다. 한 사람이 하루 평균 2톤씩 파내야 했고 안전시설이 없어 사고도 많이 났다. 남사할린의 철도는 한국인의 인력으로 건설됐는데, 한국인의 시체를 침목으로 깔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군국주의 정책에 따라 한국인들은 일본화돼야 했다. 우리들은 일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말만 사용해야 했다. 일본 국민이었고 이름조차 일본 이름으로 바꿔야 했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소련 점령군에게서 일본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고 희생됐다.

 

 

“조선인들을 죽여라!”

 

제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또 하나의 비극이 일어났다. 일본이 전쟁에서 완패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인이 스파이로 소련군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센징’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故 김경순 씨의 증언에 의하면 1945년 8월 18일에 가미시스카 (현재 레오니도보)에서 해방 당시 소련군이 진격하는데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스파이라며 아버지 김경백(54)과 오빠 김정대(18) 등 18명을 끌고 가 모두 불태워 죽였다.

 

1991년 6월 사할린의 한글신문인 “새 고려 신문”이 소련 점령군 재판 기록을 통해 밝혀낸 미즈호 (현재 포자르스코예)촌 학살 사건이 우리의 가슴을 또다시 아프게 했다.

 

1945년 8월 20일부터 23일까지 일본인들이 어린이와 여자들을 포함한 27명의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칼과 사냥총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집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고 한다.

 

“일본이 패한 데다 조선인들이 소련군을 반가이 맞이한다는 소문을 듣고 괘씸해서 모두 죽이기로 했습니다. 한 여인이 다섯 아이를 데리고 떨고 있는 것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모두 칼로 찔러 길가 웅덩이에 던졌다”라고 한 일본인이 재판에서 말했다.

 

이런 만행은 사할린 곳곳에서 일어났다고 동포 1세 노인들은 말했다. 일본인들은 같이 피난 간 한국인들을 코르사코브(이전 오오도마리)와 홈스크(이전 마오카) 항구에 있는 창고에 몰아넣고 불질러 죽였다.

 

[ 글=박승의 전 사할린 국립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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