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馬耳山)에 가서 이갑용 처사가 쌓았다는 돌탑 앞에 섰을 때다. 이 탑을 쌓은 노인은 전국을 다니며 돌을 골라 가져다 탑을 쌓았다고 한다. 어떤 의미를 두고 쌓았기에 탑은 폭풍 번개에도 끄떡없이 견디며 오늘을 가고 있을까. 말 귀를 닮았다는 산에 이 탑을 쌓은 속 깊은 뜻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다 ‘나는 지금 무엇 하며 살아 왔는가?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글 짓는 것 제하고는 어떤 재주도 능력도 좋아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자발적 소외와 자가 격리 같이 스스로 외로워했고 고통스런 생각 끝에 손짓의 언어들을 원고지에 옮겨 심는 생활이었다. 혼자서 그늘진 곳에 우두커니 밀려나 외로움을 타는 슬픈 정조(情操)를 지닌 삶이었다. 그때였다. 이갑용 처사가 돌탑을 쌓았다면 작가는 글탑을 쌓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글탑과 글맷돌’ 생각이 가슴 속 위로나 되는 듯 내 품에 안기었다. 이갑룡 씨가 각처의 돌을 문장의 언어나 되는 듯 옮겨다 탑이란 돌의 시를 쌓아 올렸다면, 작가는 언어를 ‘돌’ 삼아 문장의 탑을 쌓아야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언어라는 돌을 맷돌에 갈아서 밀가루를 만들어 빵과 과자를 빚어서 사람들에게 착한 양
자유와 방종의 경계선은 무엇인가? 굳이 에릭 프롬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의 자유인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가 중요하다. 베트남에서 한달을 머물고 있다. 분명히 자유가 있다. 그런데 TV나 사회 모습을 보면 내가 그간 경험해 온 남한과 미국과는 다른 차이가 있다. 보이지 않는 한계가 있다.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해가 되는 장면은 거의 없다. 외국영화를 방영할 경우에도 그런 것 같다. 주로 할리우드 영화이지만, 그런 장면은 삭제하고 있다. 이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가? 프랑스와 미국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하고 그들과 싸워 이긴 국가로서 서양문명에 대한 경계심과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방식을 추구한다. 자유민주주의의 함정은 집단이 빠진 개인의 자유를 말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자유는 천차만별이다. 누구에게는 자유이지만, 누구에게는 꿈같은 일이다. 생명은 똑같이 소중한데, 힘이 강한 개인은 힘이 약한 개인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게 마련이다. 이는 참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가 곧 '자유'가 아니다. 곧 집단으로서의 자유가 개인으로서의 자유보다 선행해야 하다는 말이다. 미국식 자유
말은 세상(의 모습)을 정직하게 나타내야 한다. 상황을 바르게 표현하지 않는 말은 사람과 사회의 바른 생각을 방해한다. 독하게 말자자면, 기만(欺瞞)이고 사기(詐欺)다. ‘기후변화’의 변화(變化)는 가치 개념이 없는, 무색무취한 단어다. 기후가 변화하고 있단다, 어쩌라고... 하다 여기까지 왔다. 코앞에 닥친 것 아니니 미뤄두자고 했던가. ‘지구온난화’의 검은 구름이 우리(의 의지) 대신 안전핀을 쥐고 흔드는 위태로운 핵폭탄, 지구촌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기후변화가 좋은 점도 있다고 했다. 적극 대응해, 가령 새로운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은 ‘의욕’도 볼 수 있었다. ‘성공사례’로 포장되기도 한다. 대구사과가 춘천사과가 됐다. 불가피한 사정도 있으리라. 당장 먹고 사는 일 급하니, 지금도 그런 생각을 벗지 못하는(않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저 현상의 물밑에 잠긴 의미는 뭐지? 아들딸 챙기면 됐지 뭐가 문제냐고들 하지만, 그 아들딸의 아들과 딸, 손자까지 생각하는 것이 사람됨이고, 덕(德)이다. 자칫 눈앞의 아들딸조차 곧 ‘지구온난화’의 태풍 속에 밀어 넣는 것은 아닌지. 지금 미국서, 방글라데시에서 참사는 벌어진다. ‘강 건너 불’이라고? 그런가! 기후변화
원고를 마무리하고 있을 즘, 이태원 사고 소식을 접했다. 끔찍한 참사를 겪은 분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핼러윈 축제는 184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이 단절된 이웃사이를 연결하여 집집이 다니며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풍습에 기원한다. 이민자들이 만든 문화가 핼러윈 축제가 되었듯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이웃을 잇고 음식을 나눠주는 문화가 있기를 희망한다. 백골이 우는 것이냐, 혼이 우는 것이냐. 서울 양천구 임대아파트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발견되기 일 년 가까운 시간을 풍화작용 없는 어둠에서 홀로 백골이 되었다. 휴대폰을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세상에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 보내줄 누구라도 있었다면, 이승과 저승이 무덤 되어 그렇게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백골로 만난 무연고 여성은 성공사례로 언론에 소개되었다. 2017년까지 정착을 돕는 전문 상담사로 일했고, 무엇이든 물어보면 잘 가르쳐준 최고의 선생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니 더욱 안타깝다. 그때는 성공했고 지금은 아닌 성공을 무엇이라 부르리. 시신이 방치되는 동안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2017년 퇴사해서 전화번호를 바꾸어 지인들과 연락도 끊어졌을 것이다. 연
한국 언론의 국제관계 인식은 백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만고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는 우크라이나의 치어리더 역할에 충실하고, 중국의 정치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추측과 비방 일변도다. 한겨레신문 박민희 기자는 10월 26일자 칼럼 《‘21세기 황제’ 시진핑이 예고한 3가지 미래》에서 “무엇보다 중국의 변화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해놓고 내용은 3류 추리소설을 써놓았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1세기 황제’로 등극했다.”는 것이다. 주장의 주요 논거는 중국의 한 외교 소식통이었다. 이는 5년 전 보도의 데자뷔다. 《시진핑 사상 명문화 · 임기 제한 삭제…‘시황제 절대권력’ 굳힌다》(서울신문), 《시진핑 ‘황제 만들기 개헌’…헌법서 글자 10개 없앤다》(중앙일보), 《‘주석 임기 철폐’ 나오자 박수…중, 시진핑 1인 체제 막 올라》(한겨레신문). 진시황제에 빗댄 비아냥거림으로 모든 매체가 한 마음이 되었다. 진시황제는 공과가 있는 역사의 인물이다. 진시황제는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완성하고, 중앙집권형 군현제와 법치,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 등으로 오늘의 중국이 있도록 기틀을
10월의 끄트머리에서 청춘 154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지경이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 정부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최우선 순위의 수습을 강조했다. 하지만, 예방할 수 있었던 후진국형 인재(人災)였다. SBS는 지난 28일, “경찰이 핼러윈 기간 동안 총 30만 명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알고 있었다. 사전 통제 부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사건 발생 하루 전, 28일에도 이태원엔 사람이 엄청 많이 몰렸다. 참사 조짐이 있었다(연합뉴스, 2022.10.30.). 압사 사건 당일, 이태원엔 서울시장은 물론이고 용산구청장, 용산지역구 국회의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행정은 부재중’이었다. 2021년 핼러윈 축제엔 17만 명이 몰렸다. 지자체 공무원과 경찰 4600명이 투입됐었다. 올핸 200여명 투입. 인원 통제 인력이 아닌, 마약 단속 병력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경찰이나 소방 인력이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지금 파악을 하고 있고요.”라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 29일 밤부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국민이 바보가 된 순간이다. N
현실은 소설보다 잔인했다. 이태원에서 젊은 청춘들이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지난밤, 연락이 닿지 않는 아이 때문에 애를 태운 부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핼로윈의 밤은 끔찍했다. 옆에는 푸른 천에 시신들이 덮여있고 다른 쪽에선 구급대원들이 미친 듯이 CPR처치를 하고 있는데 상황을 모르는 지척에선 클럽의 음악에 맞춰 떼창과 춤이 멈추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왜 대한민국에선 이런 말도 안되는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인지.. 이를 묻고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애도는 희생자를 능멸하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행사는 많다. 특히 대한민국은 수십만 명정도의 집회는 주말마다 예사로 치러낸다. 여의도나 해운대 등에서 매년 개최되는 불꽃축제도 백만명은 우습게 모인다. 이런 대규모 군중이 몰려도 별다른 사고없이 치러낸 것은 주최측과 행정, 경찰력이 적절히 교통을 통제하고 동선을 유도해왔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태원에 더 많은 인파가 몰렸어도 무탈하게 지나갔다. 더구나 사고가 나기 하루 전에도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사고가 벌어질 뻔 했다고 한다. 도대체 29일 밤 대한민국 수도서울의 행정
마스크 시대가 지나간다. 숨쉬기 불편하고 트러블을 일으키는 답답한 마스크는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와 더불어 서서히 절대적이던 위력을 잃어간다. 하지만 2년 전 코로나가 끝나면 마스크를 불 질러버리겠다던 사람들은 이미 마스크 의존에 빠졌다. 콘서트장이나 축제장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더라도, 산길을 걷거나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조차 마스크와 한몸이다. 알레르기나 감기 예방, 수시로 돌아오는 코로나 재 유행에 대한 불안 때문만은 아니다. 마스크를 벗는 순간 자신의 보호막을 잃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가오 판츠(顔パンツ)’,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마스크의 별명은 ‘얼굴 팬티’다.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팬티를 입지 않은 것처럼 얼굴이 허전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다. 물론 미국에서도 마스크를 쓴 모습이 더 멋져 보인다는 의미의 ‘마스크 피싱’이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한국에서도 마스크를 썼을 때와 벗었을 때의 차이가 크다는 의미의 ‘마기꾼’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하지만 ‘얼굴 팬티’는 외모적인 면이 아닌 심리적인 문제다. 일본 젊은이들의 마스크 의존을 일종의 현대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세상에 익숙하고 사람을 직접 만나 교
일정한 한계를 넘는 자기애(自己愛)는 마음의 병이다. 그것이 극한에 다다르면 이른바 과대망상이라고 하는 정신적 질환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부정이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들은 사실은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타락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의 욕심과 번뇌야말로 가장 잔인한 폭군이다. 그것에 굴복하는 날, 우리는 그 비참한 노예가 되어 호흡마저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오직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그러한 노예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다. (페늘롱)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보기 드물다. 사사로운 욕심이야말로 자기기만, 자기변호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다. 진리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경우, 사람들은 진리에 두려움을 느낀다. 처세 철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형편에 따라 인생에 적용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같이 사사로운 욕심에서 오는 편견이 이 이기주의의 수법에서 나오는 모든 그릇된 생각을 합리화한다. 인류가 바라는 유일한 진보는 향락의 증대이다. 자기희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공간적 단절은 사람들에게 심한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생산해 냈다. 지난 3년은 각자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거나 또는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았던 코로나19 상황도 조금씩 종식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차 활기를 찾고 코로나19의 대표적 제재 대상이었던 해외여행도 시작되었다. 아마도 공간적 단절의 대표적 사례가 해외여행의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때마침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내게도 베트남을 가야 할 일이 생겼기에 오래전부터 꼭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장소를 가보기로 했다. 그곳은 한국인에게 베트남의 대표적인 휴양도시로 알려진 다낭의 시골 마을인 퐁니퐁넛(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이었다. 내가 이 마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한 응우옌티탄(학살 당시 8세)씨와 남베트남군으로서 직접 학살을 목격했던 응우옌득쩌이(학살당시 28세)씨를 TV에서 보고 난 이후였다. 그들은 한국의 해병대에 의해 상해를 입은 피해자들로서 한국정부에게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 방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내게는 다낭의 시골마을인 퐁니퐁넛을 방문하고자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