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19 북한 김여정은 윤석열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제안한 ‘담대한 구상’에 대해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고 반응하였다. 김여정은 ‘담대한 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거부한 10년전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용어 선택에서부터 입장 표명 주체,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동 번영에 대한 고민 등에 있어 여러모로 아쉬운 북한의 반응이다. 담대한 구상은 남북이 상호 협력하면서 함께 번영 발전해 나가자는 구상이다. 다만 구상 실현을 위해서는 북한이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핵무기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겠다는 의지 즉, 확고한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핵무기가 선제적으로 해결되어야 협력하겠다는 ‘리비아’식 해법과는 달리 비핵화 의지만 확실하다면 우리 및 국제사회가 협력해서 북한의 민생고를 해결하고 경제성장을 이루도록 지원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제안에 대해 북한이 주민들이 학습하는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냉랭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남한과 북한의 생각이 다름이며 서로에 대한 불신과 경계가 다름의 주된 요인이다. 분단된 지 7
사람들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그 반대 또한 진리이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만약 어떤 일이 선을 배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 선한 일이 아니거나 아직 그 일을 할 시기가 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양심과 이성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의 불을 켜주고 있다. 폭력으로는 믿음의 불을 켤 수 없다. 폭력과 위협이 가져다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공포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 방황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나무라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미망으로 인해 이미 충분히 불행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을 때는 그들을 나무라도 상관없지만, 오히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켜 그들을 더욱 돌아서게 만든다. (파스칼) 우리는 오히려, 과거의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일치의 기초를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마르티노) 신앙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수단으로 신앙을 도입하고 그것을 보호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을 강요하면 오히려 증오를 불러일으키
지난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이었다. 일제에 강제 병합된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한다는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서 해방이 됐지만 일본은 두 나라의 관계개선을 위해 보여야할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처럼 전범국이었던 독일과는 달리 과거사 청산을 위한 진정한 사과에 인색했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가 하면 여전히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긴다. 2019년 7월엔 일본 총리 아베 신조가 수출통제 조치까지 함으로써 우리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물론 우리 국민들도 일본상품 사지 않기, 일본여행 하지 않기 운동 등으로 맞섰다. 해방된 지 77년이 넘었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일본 재무성의 전신인 대장성 관료 출신 경제석학인 노구치 교수는 지난해 12월 한 매체에 ‘일본은 20년 후에는 경제 규모에서 한국에 추월 당한다-그 유감스러운 이유는’이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한국의 임금은 일본보다 높아졌다. 여러 지표에서 한국은 이미 일본을 제쳤다”면서 양국의 임금,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유수 대학의 상황, 영어 능력 등…
추석(秋夕)의 계절, 가을이다. 가을은 그 저녁(夕) 추석이 정겹고, 그 물결(波) 추파는 은근하다. 추파(秋波)가 무엇인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 바람에 시나브로 일렁이는 호수처럼, 가을의 물결은 조용하고 투명하다. 맑아서 서늘하다. 사람 눈빛이라면 보는 이의 가슴을 싸늘하게 얼려버릴 강렬함을 품었겠다. 사랑을 구하는 여인의 그것이라면 아름다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날카로운 비수(匕首)는 아닐까. (2016년 9월) 언어는 역사를 품는다. 그 틀(프레임)이 보듬었던 지난 사람들의 마음(생각)이 그 글자의 획(劃)과 점(點)에 빼곡히 서렸다. 세상 이치다. 서양 언어와 생각(철학)도 비슷하다. 가을의 물결이 ‘은근한 눈빛’이더니 마침내 ‘엉큼한 아첨’이 되었다. 원래의 뜻을 모르는 이들도 있겠다. ‘추파가 윙크지 왜 가을의 물결이야?’ 하는 질문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전엔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이 秋波의 1번 풀이다.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은근히 보내는 눈길’과 ‘환심을 사려 아첨하는 태도나 기색’이 2, 3번 풀이다. 초사(楚辭)의 ‘초혼(招魂)’, 초나라 문장(시)의 대표 격(格)인 굴원 등의 작품 모음 중 주목할 시다.…
국가가 없으면 어찌될까. 보호해줄 국가가 없기 때문에 살아있어도 투명 인간이다. 그래서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 했으니, 개인에게 국가라는 울타리는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고 희망이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면 그곳은 터전이 아니라 속박이 된다. 삶의 터전을 잃어보았기에 역할을 상실한 국가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프게 경험했다. 조국이라는 말은 타향에서 서러움을 가진 사람에게 향수처럼 다가온다. 1960년대 부모님은 두만강을 건너 북조선으로 갔다. 처음에는 못 생긴 고무신에 딱딱한 과자도 좋았다고 했다. 사는 것이 형편없이 불편해서 아버지는 몇 번이고 이전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미 막혀버린 국경과 가정이라는 멍에를 놓을 수 없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두만강 너머 정든 사람들이 그리워 흘린 눈물이 한(恨)이 되었다. 이십년의 시간이 흐른 뒤 국경을 넘을 합법적 여권이 나왔을 때 기쁨과 회한으로 뒤섞인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했다. 당연한 권리이지만 국가를 위해 희생한 지나간 세월은 어디에도 보상받을 곳이 없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1948
김건희 씨의 2007년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디지털미디어디자인학과 컨텐츠디자인 전공의 박사학위 논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 - ‘애니타’ 개발과 시장 적용을 중심으로'의 표절 사실에 대해 대학사회가 어수선하다. 김 씨는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구연상 교수의 2002년 논문 '디지털 컨텐츠와 사이버 문화'를 표절했고, 국민대는 조사 결과 표절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구 교수는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문단을 통째로 베끼는 등 “완전 표절”이라고 밝혔다. 구 교수를 인터뷰한 MBC 시사집중 8월 8일 방송에서 진행자는 특수대학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국민대 교수의 발언을 소개하기도 했다. “특수대학원 같은 경우는 박사학위 논문 검증이나 심사과정이 좀 상대적으로 허술하고 이런 것들을 오히려 감안”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국민대 교수의 발언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문제의 대학원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이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특수대학원이 아니라 전문대학원이다. 특수대학원은 전문가 재교육을 목표로 하는 석사과정으로 박사과정이 없다. 대학교수가 전문대학원과 특수대학원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대학원 과정이 난삽하다. 김건희 씨는 국민대 외에 숙
이성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인생의 법칙을 배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배반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그것을 편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그 익숙한 생활을 방해하려는 이성의 목소리를 압살하려고 애쓴다. 사람은 자신의 생활이 양심에 합치되지 않으면 양심이 마비되어 생활에 장단을 맞춘다. 사격을 받고 있는 엄폐물 뒤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병사들은, 위험한 순간을 더 쉽게 견딜 수 있도록 애써 일거리를 찾는다. 사람들도 때때로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은 명예욕으로, 어떤 사람은 오락으로, 어떤 사람은 법률 문서를 씀으로써, 어떤 사람은 향락으로, 어떤 사람은 정치활동으로 그것을 견디고 있다. 폭풍이 나무를 뽑고 바위를 굴리지만 하루를 못 갑니다. 정말 크고 강한 것은 소리 없이 흐르는 맑은 시내입니다. 살진 들을 적셔 천하를 기르는 것도 그것이요, 모든 비, 바람, 구름, 물결을 일으키면서도 자기는 억만 년 노함도 흔들림도 없는 대양의 가슴을 채워주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시내는 억억만만의 물방울이 음악 속에 하나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시내보다도 더 무한히 큰 것은 역사의 흐름이요 그 흐름을 이루는 것은 씨ᄋᆞᆯ입니다
‘불편을 끼쳐 드린 점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 ‘심심한’ 이란 단어가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젊은 세대의 어휘력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지루한 사과’로 오해한 젊은 세대를 향해 나이 든 세대가 ‘이런 단어도 모른단 말이야?’라며 거드름을 피운다. 필자도 한 축하행사에서 옆 자리 안면 있는 대학 교수에게 기성 세대 눈으로 이 말을 꺼냈다가 핀잔을 들었다. ‘심심한’을 ‘깊은’으로 바꾸면 누구나 다 알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나의 의견에 동조해 주지 않아 서운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혼자 생각해보니 ‘나도 역시 꼰대가 되고 있구나’라고 반성했다. 역시 젊은 세대를 가르치는 직업이라 달랐다. 젊은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뜻을 몰라 ‘그 뜻이 뭐야?’라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킹받을’ 때(열받을 때)’, ‘존맛탱(아주 맛있다)’, 헬창(헬스 매니아) 등이 이런 말들이다. 언론도 유행어 유통에 크게 일조한다. 정치권에서 한 말이 언론을 타면 일상어가 된다. ‘개딸(개혁의 딸)’, ‘이대남(20대 남자)’처럼. 해외 언론도 우리 언어를 번역하기보다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서울의 집중호우 피해를 보도하면서 반지하를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