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벽의 심우도(尋牛圖)는 소를 찾는 그림, 불교의 오래된 상징 중 하나다. 상징은 말과 글의 세계, 나아가 문명의 씨앗이다. 소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읽자. 우리 불교와 사상, 정서적 전통에서도 이미지 크다. 만해(卍海)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다. 뜻 크고 깊은 스님 만해, 아름다운 시 언어로 인류를 가르쳤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3·1 독립선언에 나섰고, 끝내 그 연꽃 마음 변절하지 않았다. 그의 종교의 친정은 인제 백담사다. 만해기념관 부근 계곡은 단풍이 극치여서 찾는 이 더 많았다. 매서우면서도 그윽한 이율배반적인 눈길, 만해 조각상에 마음 숙였다. 저런 스승 있으매 오늘 우리가 이리 당당하리라. 마침 이재명 이낙연 두 후보의 재회(再會) 배경 벽면에 우연히 걸린 찾을 尋(심)자 액자에 주목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우연일까, 허나 중요한 만남의 상징으로 여겨 그 시사(示唆)하는 바를 찾는 것이겠다. 한자가 그림임을 잘 보여주는 글자다. 손 모양 계(彐) 아래 만들 공(工)과 입 구(口)다. 다시 쓰면 左(좌)와 右(우)다. 아래는 손목에 점찍은 마디 촌(寸)이다.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둠 속 안개바다를 좌우로 손 내밀어 한…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
우리의 생명의식과 신의 관계는 우리의 감성과 세계 또는 사물과의 관계와 같다. 감성이 없으면 우리는 세계와 사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생명의 의식이 없으면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신을 섬기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고 이성이 주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사를 가지면서도 역시 정의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신이다. 대체로 우리의 마음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인식을 이성에 전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다. 또 과연 이성은 마음 없이 저 혼자 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을 인식해야 이성이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리히텐베르크) 신의 이념은 확실히 위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한하게 정화되고 무한하게 높여진 우리의 정신적 자질의 이념이다. 신성 이념의 기초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채닝)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좋은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엔젤리스 실리시어스)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화해 정착을 위한 노력을 요청하고 북한을 방문해줄 것을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에는 유엔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종전선언 추진상황을 설명하고 회원국들의 적극적 지지와 협조를 구했다. 이를 위해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을 미국에 보내 한반도 정책 관계자들을 만나 종전선언의 당위성을 설득하도록 하기도 했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의 남북 평화정착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평가할 만하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의 분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미국이 주도한 것이다. 분단이 운명이라면 마땅히 전범국가 일본이 그 짐을 지어야 했음에도 미국 등 강대국은 한반도에 그 업보를 뒤집어씌운 셈이다. 미국은 일제 강점기 친일 민족반역자 집단을 재기용함으로써 민족 내부의 갈등을 촉발하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전쟁에 이르게 했다. 이 죄업은 두고두고 미국이 갚아야 할 역사적 책무를 상기시킨다. 또한 미국은 군정을 통해 민족 내부에서 일어났던 정당한 단독정부 반대운동을 유혈 진압(4·3 사건)했을 뿐 아니라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 협상을 방해함으로써 민족국가 형성과 평화 정착 노력을 초기부터 깨트린…
-비르투스와 포르투나 ‘비르투스(Virtus)’라는 라틴어는 ‘미덕(美德)’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virtue’의 뿌리가 되는 말이다. 전쟁을 통해 국가의 힘을 확장했던 고대 로마에서 비르투스는 우선 전사(戰士)의 주력부대일 수 밖에 없는 남성들의 “용기”를 뜻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에 대한 용기였을까? <로마사 논고(論考)>를 쓴 마키아벨리는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군주론>을 썼는데 그가 돌파하려 했던 것은 “운명”이었다. ‘포르투나(fortuna)’라고 불린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진 경로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었고, 용기는 이와 대결해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자질(qualita)’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따라서 바로 이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제왕학(帝王學)이었다. 1469년에 태어나 1527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았던 당대의 이탈리아는 외세에 휘둘려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민중들의 삶은 따라서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고 재난이 겹치면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한 폭정”에 시달렸다. 그러니 이탈리아의 독립과 그에…
지금 내 손에 들려 잠 못 들게 하는 책은 ‘세 여자’다. 작가 조선희는 잊혀진 여성독립투사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 세 여자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되살려 놓았다. 2017년 나온 책을 읽은 이들은 ‘3년 전 화제가 됐을 때 안 읽고 왜 이제야?’ 하고 물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답이 오늘 글의 주제다.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전작들을 제목만 보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 고 지레짐작,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었다. 또 그 기억으로 ‘세 여자’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내 독서모임 다음 책이 ‘세 여자’로 선정돼 내 의지 없이 잡게 된 것이다. 소설은 나를 단박 100년 전, 역사의 격변 속에 떨구었고 세 여자의 파란만장한 운명의 회오리에 휘몰리게 했고 이틀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근거 부실한 순간 감정의 선입견을 반성한다. 그 같은 선입견으로 놓친 음악이 얼마나 많았을까. 뒤늦게 듣기 시작한 그리스 출신 미국 작곡가 야니(본명 야니스 흐리소말리스 Yannis Hrysomallis)와의 만남도 그랬다. 음악광 친구와 대화하다 ‘왜 야니 음악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들었다. ‘전자음악 쓰는 뉴에이지 음악가잖아. 몇 곡 들어봤는데 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떠날 거라 했다. 서른세 살에는 미치지 않으면 자살하게 될 운명이라 했다. 인도 뉴델리 파하르간즈 골목에서 만난 예언자라는 이의 말이었다. 스무 해 전, 나는 한국을 떠났다. 중국에서 터키까지 두 해에 걸쳐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았다. 사랑하던 이를 잃고 힘겨운 마음으로 견디던 여정(旅程)이었다. 그 한 복판에서 듣게 된 끔찍한 예언이었다. 탁류(濁流)에 휩쓸려 깊고 어두운 강 아래로 내가 가라앉는 일시정지 화면이었다. 화가 치밀어 좌충우돌 목적지도 없이 버스를 탔다.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다. 사흘 밤낮 의자에 꼿꼿이 앉아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히말라야 산맥 해발 2천 미터 고도에 위치한 마날리였다. 해가 저물기도 전인데 버스는 끊겼다.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묵어야 했다. 더군다나 알고 보니 온천 마을.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않는 자학 프로그램”이 버스 끊긴 산속 온천 마을에서 자동 종료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고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작정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을 굶어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사과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만큼 가혹
자유로운 존재도 자기 자신에게만 얽매여 있으면 악마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된다. 도덕의 세계에는 주인 없는 땅이 없으며 애매한 땅은 모두 악마에게 속해 있다. (아미엘) 네가 세속적인 통념과 세속적인 관심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너는 세상 사람들의 동의와 칭찬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끝없이 사람들의 눈치만 보다가는 아무것도 결단할 수 없다. 사람들의 평가는 무한하고 다양하다. 너는 말할 것이다. “나는 훌륭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그러나 네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이제부터 하려는 행위를 칭찬해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내면 생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과 다른 남들의 생각 속에 사는 가공의 자신을 추구하며, 억지로 자신을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가공의 자신을 장식하는데 정신을 쏟느라, 실제의 자신은 소홀히 한다. 만약 우리가 평정과 성실과 관대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서둘러 그것을 과시하며 그 미덕을 가공의 자신에게 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한 미덕을 가공의 자신에게 줄 수 있다면, 진정한 자신은 그것을 잃어도 좋다
문재인 정부가 고심 끝에 생각해낸 UN에서의 종전선언 제안과 이를 통해 북미 남북대화를 재개하여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다시 궤도에 올려놓으려 했던 야심 찬 의도가 미국의 이견(異見)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국이다. 비록 중대과제 선결이란 조건을 달았어도 북한의 긍정적 반응과 중국의 환영의 뜻에 기대에 차서 미국으로 건너가 카운터파트인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을 설득코자 했던 서훈 안보실장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하다. 설리번은 ‘정확한 순서, 시점, 조건’을 제시하며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선 비핵화 조치가 있어야 종전선언은 물론 북미대화, 나아가 관계개선이 가능하다는 종래의 미국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종전선언의 의미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 정치적 상징적 선언의 의미밖에 없다고 하지만 현재와 같은 교착상태에서는 북미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어 관계 당사자들의 한반도 비핵화 논의를 재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좋은 아이디어에 대해 미국이 소극적인 이유는 무엇이고 미국을 설득하여 종전선언의 테이블로 인도할 방책은 없는 것일까. 미국이 현 상황에서 종전선언
나의 삶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어떠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사명을 두고 있는 사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아직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 참으로 선량한 사람들의 겸양은 무의식 중에 나타난다. 그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이미 한 일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중국 속담) 까치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스스로 과시하는 사람은 스스로 빛날 수 없다.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은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좋은 일은